컴퓨터 파노라마 [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4

예전에 읽었던 "컴퓨터 파노라마" 란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국 컴퓨터사를 정리한 기사인데… 한동안 기억속에서 잃어 버리고 있다가 오랜만에 하드디스크를 정리를 하면서 찾아냈습니다.
이제는 전자신문 사이트에서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여러분들과 공유를 하고 싶어 올립니다.
혹시나, 저작권등의 문제가 있을시에는 "주인장님…" 삭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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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size:3o3zogsk]

차례
1.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2.도입기 (1) 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
3.도입기 (2)
4.도입기 (3)
5.도입기 (4) 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
6.적응기 (1) 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
7.적응기 (2)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
8.적응기 (3) 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
9.적응기 (4) 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
10.적응기 (5)
11.적응기 (6) 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
12.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
13.적응기 (8) 최초의 국산 컴퓨터 「세종1호」
14.적응기 (9) 한국IBM의 터잡기
15.도약기 (1) 대학의 고급인력 양성
16.도약기 (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17.도약기 (3) 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
18.도약기 (4) 삼성전자와 휴렛패커드
19.도약기 (5) 컴퓨터 국산화의 세가지 갈래
20.도약기 (6)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과 마이크로컴퓨터
21.도약기 (7) 충북도청 행정정보시스템 시범사업
22.도약기 (8) 전경련 보고서와 과학기술처
23.도입기 (9) 컴퓨터 원격탐사로 섬을 발견하다
24.도약기 (10)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대 전자관련연구소
25.도약기 (11)
26.방황기 (1) 컴퓨터 도입 승인기준이 마련되다
27.방황기 (2)
28.방황기 (3) PC산업의 태동
29.방황기 (4) 체신부의 부상 … 전기통신에 정보통신 접목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
<114전화안내시스템>
<전자식 공중전화기>
30.방황기 (5) 1981년 선거개표 방송
31.방황기 (6) 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나다
32.방황기 (7) 청계천 전자상가
33.방황기 (8)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등장-명필
34.방황기 (9)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
35.방황기 (10) 정보산업 육성과 대통령의 관심
36.방황기 (11) 교육용PC보급 계획-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37.정착기 (1) 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
38.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
39.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40.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
41.정착기 (5) 2.18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42.정착기 (6)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
43.정착기 (7)
44.정착기 (8)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하)-행정망 사업
45.에필로그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1) 방황기 (6) 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나다[/size:3o3zogsk]

우리나라 컴퓨터 도입역사에서 70년대는 정부와 업계 모두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기였다. 어떻게든 컴퓨터를 많이 도입해서 업무의 전산화를확대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또 컴퓨터 하드웨어를 국산화 하여 수출전략품목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에 불타기도 했다.

물론 하드웨어의 국산화 열기는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등 당시 관련 3부처가 벌였던 정보산업 정책 주도권 싸움의 핵으로 부상하면서 8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계속된 현상이었다. 이 싸움이 가능 했던 것은 지금과 달리 국산화라는 것이 정부 정책이나 입김이 있어야만 추진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업계는 정부가 끌어 주는데로 앞만보고 달리면 되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보급이 급속하게 확대되는 8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와업계는 앞쪽 뿐아니라 옆과 뒤도 함께 돌아다보아야 할 여러 <의무>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 <의무> 가운데 하나가 수십여종이 난립해 있던 한글코드나 키보드 자판배열의 통일 등 컴퓨터 분야 표준화작업이었다.

컴퓨터 분야의 표준화 <의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과 한자를컴퓨터에 제대로 적용하려는 일단의 노력이기도 했다.

특히 관심을 모았던 한글코드의 통일은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키보드에서한글을 입력해서 모니터나 프린터에 그대로 출력돼 나오도록 하는 컴퓨터 부호처리 체계를 국가차원에서 표준화하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글코드는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작업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아가서는 워드프로세서 등 응용프로그램에서 한글로 된 데이터를 작성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데이터베이스의 검색이나 정렬(소팅)시 한글 가나다순 처리가 가능해야 했다.

이같은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정부 표준 한글코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74년 9월이다. 과기처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해 만든 이 코드는 자소(초, 중, 종성의 단위)의 값을 7비트로 규정하는 <7비트N바이트>방식으로서 글자 하나의 값을 통털어 2바이트(16비트)로 규정하고 있는 오늘날의표준코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7비트N바이트> 한글코드는 컴퓨터 보급이 활성화되지 못한데다 공급회사도 몇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상황에서 업계나 사용자 의견을 들어 볼 틈도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정한 것이었다. 한자코드에 대한 규정도 없었던데다 문제점도 적지 않게 노출됐다. 결국 컴퓨터 공급회사들이 아전인수격으로 만든 수십여종의 자체 코드가 범람하게 됐고 기종간 호환성은 물론이고한글의 과학적 특성이 철저히 무시돼 처리효율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는상황이었다.

키보드배열 역시 자판에 기본적으로 수용하는 한글자모의 갯수나 배열순이공급업체마다 모두 달라 혼선이 극에 달했고 한자코드는 79년에 마련된 <KSC 5714>가 있었으나 한글코드와 병행되지 못하는 반쪽코드였다.

상황이 이쯤되자 80년 10월 과기처는 정부기관「단체「업계를 대상으로 「표준화 활용에 관한 의견조사」라는 것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본뜻은 컴퓨터분야 표준화사업을 범가국적인 사업으로 공식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과기처 실무책임자였던 C기정의 회고.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대만 등이 컴퓨터산업을 자국의 미래 전략산업으로 꼽아놓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기본 환경인 표준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해 놓고 있었죠. 정부 정책의 효율성은 물론이고 산업 활성화나 컴퓨터 마인드 확산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준화 문제는 누가 혼자 떠든다고 해서 해결되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는거죠. 범부처 또는 민관을 통털어 어떤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본것입니다』

이같은 분위기는 일사천리로 확산돼 마침내 80년 12월29일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문교부, 내무부, 총무처 등 6개부처를 비롯 업계, 학계, 연구계, 사용자 등이 과기처회의실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비로소컴퓨터 표준화 사업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표준화시안 마련을 위한 특별 연구반 설치가 합의 됐다.

컴퓨터 표준화사업추진위원회에는 당시 과기처 정보산업국장 최영환을 위원장으로 관련부처 등에서 책임자급 23명이 위촉됐다. 이 위원회는 표준화사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연구반 구성, 표준의 시행에 관한 사항 등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실무기구였다.

특별 연구반은 컴퓨터표준화사업추진위원회측과 KIST측간에 있었던 연구용역 계약에 의해 탄생된 일종의 태스크포스팀이었다. 특별 연구반에는 KIST전산개발센터 소장이던 성기수와 이기식을 공동 반장으로 정왕호, 박동인, 정진욱, 변옥환, 박명호 등 당시 잘나가던 KIST의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연구의 중대성을 감안 각 관련분야의 전문인사들이 연구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특별 연구반의 활동기간은 81년 5월말부터 82년 1월말까지 8개월 동안이었다. 활동기간동안 특별연구반이 새로운 시안을 마련할 때마다 자문회의가 이를 받아들여 검토했고 추진위원회는 자문회의의 검토 결과를 추인했는 일을반복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실패작으로 끝난 74년판 한글코드 제정에 참여한 경험을갖고 있던터라 특별연구반의 연구 활동은 신중한 편이었다. 첫 과제로 착수한 것은 40여개의 컴퓨터공급회사와 국산화업체에 대한 기초 자료조사였다.
그런데 이 기초 자료조사에서 놀라운 사실이 보고됐다. 한글코드와 키보드배열 종류가 조사 대상 업체수와 같은 40여종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문제는 이 40여종의 체계들을 어떻게 하나로 표준화(단일화)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추진위원회는 특별연구반의 운신에 대한 폭을 넓혀주기 위한 다음과같은 3가지의 기본원칙을 마련했다.

1.컴퓨터산업의 국제화에 대비하고 국제 표준 규격과 관례를 존중한다. 2.
현행 다수 기종의 사례를 참작하되 표준화 단계에서 적용범위를 구체화 한다.

3.표준화가 미래 기술 발전에 저해요소가 되지않도록 배려한다.

이같은 원칙에 따라 마련된 특별연구반의 한글코드와 한자코드 및 키보드배열 표준 시안은 81년 12월 공청회를 거쳐 82년 1월 과기처에 공식으로 제출됐고 이해 5월 KS표준으로 확정됐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이 표준가운데키보드 배열 분야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핵심분야 였고 가장 관심이 높았던한글코드와 한자코드 74년판 보다 더 처절한 실패작으로 끝났다. 새로 제정한 코드에 대해 어떤 공급업체들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업체들의 독자의 범람이 이전부더 훨씬 심해져 한글코드체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혼란은 이미 시안 마련과정에서 부터 예상돼 온 것이었다.

한글코드의 경우 기본 코드로서 기존 74년판 <7비트N바이트>코드를 그대로 유지한채 새롭게 <2바이트(16비트) 조합형>과 <8비트N바이트>코드를보조 코드로 추가한 것에 불과했다. <2바이트조합형>이란 초, 중, 종성을갖춘 글자 하나의 값을 무조건 16비트로 한 것이고 <8비트N바이트>는 초, 중, 종성을 구성하는 자소 하나 값을 8비트로 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8비트N바이트>는 <7비트N바이트>처럼 종성이 홑자음인가 겹자음인가에 따라 글자 하나의 값이 2바이트에서 4바이트까지 가변될 수 있는 코드체계였다.

새 표준에서는 3개 방식의 코드를 표준 규격으로 병행하자는 것이었는데여기에 업계가 호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보조코드로 추가된 <2바이트조합형>은 당시 최고의 컴퓨터회사였던 한국IBM을 비롯 삼보전자, 큐닉스컴퓨터 등이 사용하던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를테면 각사 코드체계를 이리 저리 짜깁기한 식이었다.

<8비트N바이트>역시 컨트롤데이터「스페리 등 대형컴퓨터공급사와 애플등에서 사용하던 것을 모은 것이었다. 각자 조금씩만만 노력하면 표준코드체계로 들어올수도 있었지만 실제 각공급사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기존 독자코드체계를 고수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7비트 2바이트완성형>와 <3바이트>등 표준체계에 끼이지 못한 코드를 사용하던 공급사들의 입장이란 불보듯 뻔했다.

물론 당시 컴퓨터공급사들은 굳이 정부가 마련한 표준에 따를 필요가 없었다. 이를테면 87년에 개정된 <KSC 5601>의 <2바이트완성형>에서 정부기관 납품용은 무조건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강제 조항 같은 것들이 전혀 없었던 터라 공급업체들이 추가비용 지불을 감수하면서까지 코드 변경에 나서지않았던 것이다.

한자코드의 상황도 비슷했는데 과기처는 결국 3년뒤인 85년 다시 KIST로하여금 한글코드와 한자코드를 통합하는 새로운 표준 한글코드 제정을 요청하게 된다. 정부의 컴퓨터분야 표준화 사업이 또다시 실패를 인정하고 만 셈이다.

그러나 82년의 표준화 사업은 비록 실패했지만 남다른 의미도 함께 던져줬다. 사상 처음으로 국가적 사업이라는 인식속에서 컴퓨터 표준화사업이 추진됐다는 점과 한글처리의 중요성이 이 사업을 계기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8.0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2) 방황기 (7) 청계천 전자상가[/size:3o3zogsk]

88년 서울 올림픽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청계천 전자상가는 누가 뭐라해도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했다. 그러나 청계천 전자상가가 이전해 새로 자리잡은 용산 전자상가를 두고 다시금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청계천 전자상가 출신으로 10여개의 기업 연구소를 두루 거친 후 현재 굴지의 기업에서 마침내 임원 반열에 오른 중견 엔지니어 A씨의 설명.

『80년대 청계천 사람들에게는 순수한 정열이 있었습니다.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나 스티브 워즈니악, CP/M를 개발한 게리 킬 들 같은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던 거죠. 돈은 나중 문제였습니다.』

A씨의 말은 청계천시대를 계승한 용산상가는 명분론적 영웅의 꿈보다 어떻게든 한몫 잡아보겠다는 실리론을 택했다는 것이다.

청계천 전자상가가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당시 한 천재 컴퓨터 소년의 인터뷰를 실은 몇몇 신문이었다.

83년 1월 20일께 국내 신문은 일제히 「약관 16세 컴퓨터 박사」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박현철 군(당시 서울 북공고 2년)을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불러 장학금을 지급하고 격려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그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박군은 중학교 2년 때부터 청계천 상가를 홀로 누비면서 조립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오디오 부품을 구입, 이를 스스로 조립하면서 전자의 세계를터득했고 3학년 때부터는 상가 컴퓨터 전문가들과 교류하면서 컴퓨터를 익히기 시작했다. 박군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청계천상가에서 가장 인기있는 애플 컴퓨터용 한글워드프로세서였다.』
이 기사는 박현철 군의 천재성과 함께 한국 컴퓨터산업의 요람으로 청계천상가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 기사들도 박군의 천재성을 발굴한 것은 학교나 선생님이 아니라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청계천 전자상가였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청계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 용산상가에서 주변기기 회사를 운영하고있는 P씨의 이에 관한 회고.

『제 기억으로는 이 기사가 컴퓨터 상가 청계천을 알리는 최초의 보도였습니다. 청계천 사람들은 한동안 박군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고 어떤 이는 기사를 그대로 오려 가게 유리문에 붙여두고 일반인들의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명성은 희미해졌지만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청계천 전자상가는 청계고가도로를 중심으로 종로 쪽으로는 「세운상가」와 「아시아상가」, 을지로 쪽으로는 「대림상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운상가는 주로 가전과 컴퓨터를, 아시아상가는 전기, 전자부품을 각각 취급했고 대림상가는 유기장용 게임기나 오락기 전문상가였다. 이 가운데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했던 곳은 컴퓨터상가의 대명사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 건물은 행정구역상으로 종로구 장사동이지만 실제는 종로3가와청계천4가를 완전히 가로질러 맞닿는 형태여서 종로 방향에서는 종로 세운상가, 청계천 쪽에서는 청계천 세운상가 하는 식으로 불렀다.

이 건물은 67년 서울시가 시내의 전파상들을 한곳에 입주시켜 동양 최대의전자상가로 육성한다는 방침에 의해 건립됐다. 세운상가가 전자상가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삼성전자와 금성사가 본격적으로 TV와 세탁기 등을 생산했던 70년대 중반 이후였다. 가전 도매상이 이곳을 수도권과 지방을 연계하는최대 요충지로 여기면서 국내 최대 전자상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70년을 전후해 이곳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컴포넌트 오디오 조립용품을 공급하는 점포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회고하는 이들도 있다. 70년대 후반 세운상가 일대에는 라디오, 오디오 부품 또는 조립 키트 전문점포만 2백여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현철 군처럼 직접 완제품을조립해보려는 공업고등학교 학생과 전파상들이 세운상가를 안방처럼 드나들게 됐고 마침내는 전국에 조립 전자제품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가전과 오디오 일색이던 세운상가에 컴퓨터 부품과 조립 키트, 완제품을공급하는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누가 이곳에 최초의컴퓨터 점포를 냈는지에 대한 자료도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전국에 1백여개의 유통망을 가진 S씨의 회고.

『제가 입주한 79년 가을만 해도 컴퓨터 매장이 20여개나 됐지만 규모가작았고 취급 품목도 대형컴퓨터 소모품이나 주변기기 부품이었습니다. 애플완제품이나 조립 키트를 구비한 곳은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은 문서세단기 등을 취급했고 어떤 곳은 밀수 오디오로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컴퓨터만취급하게 된 것은 83년부터입니다.』

S씨의 회고대로라면 세운상가에서 처음부터 컴퓨터만 취급하겠다고 나선곳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수익이 좋았던 가전 등을 취급하다가 차츰컴퓨터에 손을 대게 됐다는 것이다.

아무튼 세운상가가 컴퓨터 상가로 발돋움한 시점은 박현철 군이 이곳을 누비던 82년께로 추정되고, 이 시기는 또 애플과 IBM이 주도하던 PC산업이 확장일로를 달리던 때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PC는 대형컴퓨터에 익숙해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이었지만 크기가 작으면서 성능이 뛰어났고 가격이 싸다는 장점 때문에 컴퓨터를 새로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TV나 라디오처럼대량판매가 가능하고 물류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국내 업계는 너도나도 PC분야 진출을 계획하던 터였다. 세운상가가 컴퓨터전문상가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바로 이같은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82년말 세운상가 내부 상가배치도를 보면 1, 2층은 가전과 난방용품 등 전기제품, 3층은 사무기기와 수입 오디오 등 가전, 4층은 컴퓨터, 5층에서 8층까지는 아파트형 공장과 사무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4층의 컴퓨터상가는 2~3평에서부터 10평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점포가 무려 1백40여개나 밀집해 있었다. 이들 점포는 각각 제품설계, 부품조달, 생산, 판매, 사후지원 등 일반 컴퓨터회사의 모든 업무를 직원 두세명이해결하는 초미니 기업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초미니 기업들은 독자적인상표보다는 「애플」나 「SE 8001」 또는 일본 아스키사의 「MZ-80」 등 유명 8비트 PC를 복제한 호환기종을 생산하는 일을 주로했다. 여기서 얻은 수익금은 독자적인 소프트웨어나 주변기기를 개발하기 위한 운영자금으로 쓰였다. 적어도 90년 초반까지 국내 PC사용환경에 필요한 각종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외국제품을 들여와 토착화하는 과정이 대부분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제품은 「청계천카드」(80년대까지 한글처리의 대명사였던 7비트 한글카드)하는 식으로 불렸다. 프린터출력용 롬이라든가 한글 바이오스를 비롯해 로터스1, 2, 3 등 외국 소프트웨어의 한글처리 솔루션, 다양한 형태의 입출력카드, 그래픽카드 등이 주요 개발품이었는데 이것은 일반 PC업체들도 감히 손댈 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고난도 기술을 요하던 분야였다.

89년에 빛을 본 한글과컴퓨터의 「한글」워드프로세서 역시 세운상가를 드나들던 이찬진 씨 등 젊은이들에 의해 개발됐고 이것을 이곳에 입주해 있던S씨가 1천만원을 들여 상품화해준 결과였다. 이때의 기억을 이찬진 사장은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한글1.0을 개발하던 시절 학교(서울대)를 마치면 거의 매일 S씨의 가게에 나가 고객지원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겨우 점심값 정도 버는 것이었지만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드웨어에 대한 메커니즘을 이때 완전히익혔지요. 한글이 특정 PC에서만 실행되던 다른 워드프로세서와 달리 모든기종에서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 덕이었습니다.』

세운상가에서 팔리거나 완제품에 끼여 공급되던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작권자가 없고 변종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제품을 개발자한 사람이 완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지금의 용어로 표현하면 이 과정은 특정제품을 해부해 새로운 응용제품을 개발해 내는 리버스엔지니어링(역공학)그 자체였다. 그러나 성행한 이 리버스엔지니어링 때문에 세운상가는 80년대말 미국과 일본 정부에게서 「동양 최대의 복제 소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세운상가의 개발력은 정부에서도 인정하던 터여서 문교부 교육용 컴퓨터보급계획과 같은 정부정책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거나 전국 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등 정부 공식행사의 스폰서로 나선 곳도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마이크로컴퓨터나 PC라는 이름으로 국산 컴퓨터를 전문 생산하던 곳은 금성반도체, 동양정밀,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금성사 등 대기업 계열과 삼보컴퓨터,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등 전문기업을 포함, 모두 10여개사 내외였다. 82년 말까지 국내에 공급된 PC는 대략 1천대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4백여대 정도를 세운상가에서 공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82∼84년까지의 PC산업 초창기, 세운상가에서 명성을 날린 곳으로는 홍익전자, 경성반도체, 신성전자, 구미전자, 중앙컴퓨터, 희망전자개발, 한림전자 등이 꼽힌다. 사실 이들이 초창기 PC산업에 공헌한 노력만을 평가한다면이들 가운데 몇개는 적어도 96년 현재 국내 컴퓨터업계 기업순위에서 10위권내에 들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초창기 세운상가 멤버가운데 지금까지 기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30여곳 정도. 그나마그때나 지금이나 기업 외형에서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대부분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8.2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3) 방황기 (8)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등장-명필[/size:3o3zogsk]

서울 정도 5백주년 기념으로 제작해서 남산에 묻힌 타입캡슐의 수장품목에한글과컴퓨터의 「한글」워드프로세서가 포함됐다해서 화제가 된적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컴퓨터가 벌써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로 자리잡게 된 까닭이었으니라.

그런데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기념관의 유물 진열대 한켠을 주의깊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한글」 소식보다 훨씬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이곳에는 지난 80년대를 풍미했던돼 우리나라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원조 「명필」(名筆)이 전시돼 있다.

명필은 정확히 말하면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와 CRT터미널 등 하드웨어와문서편집용 소프트웨어가 일체화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이다. 벌써 옛날 얘기가 돼버렸지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삼보컴퓨터나 대우통신 등 유명 PC회사들도 방식은 달랐지만 「젬워드」나 「르모」와 같은 워드프로세서전용기를 만들어 짧짧한 수익을 올렸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하드웨어 독립적인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금성소프트웨어(현 LG소프트웨어)가 행정전산망PC용으로 내놓은 「하나」가 개발되던 87년을 전후해서 이다. 그러니까 「하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명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워드프로세서 였던것이다.

명필은 지금은 도산한 한화그룹 계열 고려시스템산업에 의해 83년에 선보여졌다. 같은 해 8월 29일자 일간 신문의 경제란에는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당시 인천시장, 성기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전산개발센터 소장 등이 참석한공장 가동 테입 커팅 행사 사진기사가 일제히 게재돼 있음을 볼수 있는데 이행사는 하루전날인 8월 28일 명필의 생산라인이 준공됐음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가동에 들어간 이 라인은 인천시 작전동에 소재한 한화그룹 부평 제2공장으로서 고려시스템산업은 이곳에서 연 3천대 규모의 명필을 생산할 요량이었다. 82년까지 우리나라의 총 마이크로컴퓨터(PC) 누적 보급대수가 1천여대 정도였으니 그 규모는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명필의 원 개발자는 KAIST 전산개발센터 제1그룹(당시 명칭)이었다.
제1그룹은 83년 과학기술처가 특정연구과제로 추진한 「보급형 워드프로세서개발」프로젝트를 산업체 위탁과제로 수행, 명필을 탄생시켰다. 공동 개발자로 기록돼 있긴 하지만 고려시스템의 역할은 명필을 상품화하고 이를 대량생산해서 시장에 내다파는 공급자였다.

명필 개발에 참여한 이들은 당시 전산개발센터 1그룹장이던 이기식(현 대우증권 부사장)을 비롯 정왕호(인터테크 이사), 박동인(시스템공학연구소 부장) 등이었다. 과학기술처는 원래 이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을 뿐아니라 83년 특정연구과제에도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을 성기수 소장(현 동명정보대 총장)과 공동개발자였던 고려시스템산업의 『노력』에 의해 특정연구과제로 추가되면서 그 비용의 50%가 정부 예산에 반영됐던 것이다.

명필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79년 KIST(KAIST의 전신)가수행한 「정보산업토착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이전체제 개발연구」라는 출연연구과제를 수행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박동인 등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8비트 Z-80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의 마이크로컴퓨터에 한글이 지원되는 CRT터미널과 라인프린터를 연결해서 한글워드프로세싱을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세상에 빛을보게된 것이 바로 국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로 기록되고 있는 「워드80」이다.

미니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전용기의 세계적인 공급회사였던 미국의 왕래버러토리즈의 지원을 업고 80년 10월 서울 을지로 미국문화원 강당에서 발표된워드80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시스템 구성방식이 까다롭고 가격이 너무 비싸 상용화에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박동인의 회고.

『70년말 80년초의 워드프로세서 개발 목표는 줄 단위의 편집기(라인 에디터) 수준을 넘어 화면 단위 편집기(스크린 에디터)로 이동해가는 단계였죠.
또 삽입, 삭제, 치환 등이 주된 기능이었고 한글, 한자, 영문을 함께 처리할수 있는 편집기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기능을 처리하기 위해 마이크로컴퓨터와 CRT터미널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는데 그 구성방법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당시로서는 첨단 기법으로 인식되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워드80이 발표될 당시 마이크로컴퓨터 한대가 웬만한 소형 아파트 한채 값이었으니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던 것은 당연했죠』

워드80의 상품화가 한계에 이르자 81년 KAIST는 민간 지원금을 끌어들어이를 개량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 「워드88」를 내놓게 된다. 민간차원에서자금을 지원한 곳은 고려시스템산업이었다.

이 워드88 개발의 경험으로 계승해서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전용 하드웨어를 개발해서 일체화 시킨 것이 바로 명필이다. 명필의 상품화와생산에 고려시스템산업이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이같은 배경에서 였다.

82년 고려시스템산업에서 상품화된 워드88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기존 워드80의 단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시장에서 주목받는 제품은 되지 못했다.
이때문에 고려시스템은 한글, 한자, 영문을 자유자재로 처리할수 있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 즉 명필의 개발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워드88등의 개발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정왕호였다. 정왕호는 이에앞서 82년 7월고려시스템산업에 스카웃돼 자리를 옮긴 상황이었다.

고려시스템산업에서 그는 우선 자신의 계획을 이동훈 사장(현 제일화재해상보험 회장)에게 알려 회사차원에서 동참하도록 만들었고 나중에는 KAIST전산개발센터 성기수 소장까지를 끌어 들였다.

결국 정왕호는 82년 말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명필 개발 계획을 「보급형워드프로세서 개발」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과기처의 83년 특정연구과제로추가시키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등의 요로에 발이 넓었던 성기수 소장의 역할이 컷음은 물론이다. 특정연구과제에 포함됐다는 것은 작게는 전체 개발비의 50%를 정부출연금에 의해 충당할수 있다는 것이고크게는 제품 판로에 대한 보증수표를 얻어냈다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해서 명필 개발 계획 즉,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 ]프로젝트는이기식이 이끌던 KAIST 전산개발센터 1그룹에 의해 산업체 위탁과제로 채택됐다.

이과제를 수행한 1그룹은 이미 워드80과 워드88의 개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의 개발 목표인 『보급형』이라는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보급형』이란 이를테면 값이 저렴한 제품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83년 당시 Z-80을 탑재한 국산 마이크로컴퓨터 가격은 포니2 자동차 값과 맞먹는 7백만원을 홋가하고 있었다. 새로운워드프로세서도 좋지만 탑재할 하드웨어 값만 7백만원이 되는 제품은 아무리해도 보급형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이기식의 회고.

『궁리 끝에 일본 후지쓰에서 개발한 일본의 보급형 워드로세서 「오아시스」를 모델로 삼기로 했죠. 가격을 2백만원대로 낮출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델로 삼은 오아시스 기종의 국내 반입이 여의치 못해 개발팀이 그 실물을 본것은 명필의 개발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씁니다.』

아뭏튼 명필은 1그룹이 개발에 착수한지 10개월만인 83년 8월에 탄생됐다.
생산단가를 최소화 하기 위해 수출용 CRT가 사용됐고 본체는 생산 중단된 금전등록기의 금형(고려시스템은 당시 이분야도 참여하고 있었다)을 변형시켜둘러씌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내에서 처음으로화면(메뉴) 중심의 기능 선택과 편집이 가능한 워드프로세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83년 10월에 발간한 한 월간지에 게재됐던 명필의 첫 광고를 보면 권장소비자 가격은 프린터를 제외하고 2백61만원이었다.

명필의 첫 고객은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프로젝트가 특정연구과제에 포함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청와대 비서실이었던 것으로 전해직고 있다.

명필은 이후 1그룹에 의해 84년 한자 처리기능을 추가한 명필II로 업그레이드 됐고 86 년 까지 명필IV 모델까지 개발됐다. 1그룹은 또 87년 명필의하드웨어를 인텔 80286기반의 IBM호환 PC용으로 이식했고 이를 계기로 스프레드시트와 그래픽기능을 함께 구현할수 있는 「수퍼 명필」의 개발까지 맡았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한편 명필이 개발돼 나올 무렵인 83년 국내에는 영문 워드프로세서의 대명사인 미국의 「워드스타」가 소수 전문가들 사이에 보급돼 있었고 국산으로는 큐닉스가 개발한 「으뜸글」이 있었다. 1인용과 2인용등 2개 기종으로 돼있던 으뜸글은 워드스타처럼 문장 중간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의 제품이었는데 메뉴선택방식의 명필과 달리 상당기간동안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면쉽게 사용할수 없는 전문가용이었다. 사용자층이 서로 분명하게 달랐음에도불구하고 명필과 으뜸글은 당시 국내 시장상황이 워낙 좁아 곳곳의 입찰경쟁에서 부딪치곤 했는데 이런 기억을 두고 정왕호는 『명필의 발전에 가장 큰역할을 한 것은 으뜸글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8.29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4) 방황기 (9)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size:3o3zogsk]

83년은 국내 컴퓨터산업 역사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해였다. 같은해 1월28일 정부는 83년도 제1차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열고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언한 것이다. 정보산업의 해 선언은 정보화 실현을 위해 정부차원에서 각종 시책을 전개하고 수천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가 이제 막 손아귀에 잡힐듯 말듯하는 정보산업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산업분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간업계에도 정보산업의해의 선언은 큰 의미를 가져다줬다. 신제품 개발에 대한 투자, 표준화 수용등 쉽게 결론에 이르기 어려운 의사결정 과정에서 비로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라는 우산 아래 오직 개발과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정부 역시 7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컴퓨터회사나 전산화 도입을추진하는 기업의 난립과 돌출행동을 추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터였다.
사실 82년까지만 해도 업계는 수시로 바뀌는 정부정책에 대해 모종의 불안감을 가졌다. 컴퓨터 국산화와 교육용 컴퓨터의 보급과 같은 특정과제를 놓고관련부처끼리 다툼을 벌일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상황은 보다 심각해졌다. 일부업체가 정부에 노골적인 불신감을 드러내면서 전산화 또는 국산화를 포기하겠다고 떼쓰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곤 했다. 82년께 과기처 정보계획국장이던 K씨의 회고.

『82년 7월 「전자계산조직(컴퓨터)의 도입 및 이용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정보산업 정책의 핵심이던 컴퓨터 도입(수입) 심사업무가 과기처에서상공부로 이관됐습니다. 대신 과기처는 복마전으로 표현됐던 컴퓨터 국산화정책을 맡게 됐는데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과기처는당시 국산화가 추진되고 있는 컴퓨터 품목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를 취하게됩니다. 이른바 「국산화 지원 조치」라는 것이었는데 국산화 업체들은 두팔을 들고 환영했지만 전산화 계획을 진행하던 금융기관, 정부기관, 대기업 등컴퓨터 수요자측은 엄청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런 식이었지요.』 불신감만 더해주던 정보산업 정책이 정보산업의 해 선포로 가닥을 잡게 된 것은정부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계기로 83년 한해동안에만 기록에 남을 만한 다수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가 시작되거나 완료됐다. 당시 신문기사를 정리해보면 현재 정보통신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대부분의 출발점이 83년으로 거슬러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몇개를 추려본다.

83.3 정보산업 육성방안 대통령에 보고 과기처, 최초 국내 컴퓨터실태 조사
83.4 KBS 2TV, 국내 최초 컴퓨터강좌 프로그램 신설 정보산업육성법(안)마련
83.5 상공부 정보산업담당 정보기기과 신설 행정전산화 계획 확정83.7 청와대에 정보산업 육성위원회 설치 국가기간전산망 구상(안) 대통령에 보고
83.11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국내진출(큐닉스와 기술제휴)83.12 국가기간전산망 기본방침 마련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이끌어낸 83년도 1차 기술진흥확대회의는 대통령을비롯, 전 국무위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 전자기술연구소(KIET),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 등 출연기관과 공사, 한국전자공업진흥회 등 단체, 기업, 대학, 연구소 등 각계 대표 2백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해 1월 28일청와대에서 열렸다.

기술진흥확대회의는 5공화국 정부가 기술개발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신념아래 기술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70년대부터 지속돼온 무역진흥확대회의를 본떠 만든 정책 상설기구였다. 의장은 대통령, 주관부처는과기처였다. 각부처, 업계, 연구계, 학계 대표 등으로 구성되는 기술진흥확대회의는 82년 11월 첫회의 이후 분기별로 한번씩 열렸는데 주요 기능은 기술개발 제도 마련과 개선, 기술성공사례 발표, 공로자에 대한 훈포장 등을통해 산학연 기술개발 의욕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이날 열린 83년 1차 회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정보산업의 해 선포가 핵심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이 회의에서 정부는 82년 11월의 첫회에서 한국데이타통신 이용태 사장(현 삼보컴퓨터 회장)이 정보산업계를 대표해서 보고했던 정보산업의 해 선언 건의를 정식으로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는 또 이정오 과기처장관이 정보산업의 해를 실현하기 위한 각종 시책을 전개하며 향후5년 동안 2천억원의 예산을 관련기술 개발에 투자하기로 하는 등의 정책방향을 제시해 언론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이날 회의 이후 정보산업 정책 관련부처였던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등과유관부처인 문교부(컴퓨터 교육), 총무처(전산행정)등 5개 부처 관계자들이바빠지기 시작했다. 정보산업의 해를 정보산업 육성 원년으로 삼는다는 기술진흥확대회의 결의에 따라 2개월 안에 그 육성방안을 마련, 대통령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83년 3월 14일 대통령에 정식 보고된 「정보산업 육성방안」은 정부가 체계적으로 정보산업 육성에 나서겠다는 것을 밝힌 최초의 정책문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정보통신산업의 자리를 다지는 계기를 제공한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망, 공안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수립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도 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호에서 소개하겠지만 정보산업 육성방안의 문건 말미에는 〈정보산업 육성을 위한 건의〉라는 것이 있는데 이 대목이 바로 오늘날 전산망조정위원회의 모태가 되는 정보산업육성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것이다.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정보산업과 반도체 관련업무를 관련기관별로 분담하고 협조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정부내 기구로서 위원장에는 대통령 비서실장, 위원에는 과기, 상공, 체신, 문교, 총무 등 5개부처 차관과 청와대 비서실의정무2, 경제, 교문 수석 등 10여명이 임명됐다. 위원회의 주요기능은 반도체공업과 정보산업육성의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중요 정책사항에 대해 심의하고조정하는 일이었다. 부처간 업무분장, 필요한 지원대책, 전문인력의 양성, 통신망과 컴퓨터의 이용기술개발사업, 관련제품의 생산 등 구체적인 역할 등에 관한 것도 포함돼 있다.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정보산업 육성방안 문건에서 구성이 건의될 당시만해도 이미 활동중이던 반도체공업육성 추진위원회에 관련기능을 보강,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한시적으로만 활동할 예정이었다. 81년에 발족됐던 반도체공업육성 추진위원회는 83년 64K D램의 개발완료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2백56K D램 개발에 착수하는 등 상당한 추진력을 과시하던중이었다. 따라서 독립기구를 만드는 것보다 반도체쪽의 성공사례와 운영방식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건의였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정보산업육성위원회 위원장도 당초에는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이 내정돼 있었고 위원도 KAIST 전산개발센터(현 시스템공학연구소) 소장,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총무처 행정관리국장, 과기처 정보계획국장 등 차관급보다 몇단계 낮은 인사들로 채워질 판이었다.

하지만 전자산업과 정보산업 육성에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전해지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위원장은 비서실장, 위원은 전원 차관급으로 격상됐다.
당시 정보산업육성위원회 실무위원회에서 연구조사활동을 벌였던 C씨의 회고.

『대통령은 정보산업 육성방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위원장을 비서실장으로 격상시키고 위원회의 기능과 목적도 반도체와 정보산업을 동등하게 배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국장급들이 나설 일은 따로 있다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비서실장이 5월 14일 「정보산업육성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관한 (대통령)의 지시」를 각부처에 하달함으로써 강력한힘을 갖는 위원회가 발족될 수 있었던 겁니다.』

83년 5월에 정식발족된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자신을 탄생시킨 정보산업의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열성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 위원회가 대통령이나위원장에 보고한 주요 정책문건들은 「국가기간전산망계획 관련 사항보고」(7월) 「국가기간 전산망 구성, 운영에 대한 각계 의견청취 보고서」(9월)「국가기간전산망 구성, 운영을 위한 제안」(10월) 등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 정보산업 현황이나 관련정책 수준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이들 보고서를 토대로 83년 12월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을 내놓게 된다. 바로 오늘날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시초가 되는 역사적인 문건이다.

정보산업 관련기구로는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직속으로 발족된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이듬해 4월 기술진흥심의회가 발족되면서 기술개발 정책업무를이관하고 행정조정지원업무만을 수행하다가 84년 8월 전산망조정위원회로 개편된다. 전산망조정위원회는 84년 이후 오늘날까지 국가 정보통신산업 정책을 의결하고 심의하는 최고 기구로 통한다. 다시 정리해보면 83년 정보산업의 해의 선포는 바로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을 알리는 소쩍새였던 셈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9.0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5) 방황기 (10) 정보산업 육성과 대통령의 관심[/size:3o3zogsk]

지난회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에서 언급했듯이 1983년이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된 것은 정부가 비로소 정보산업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산업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했다.

정보산업의 해가 선포되자, 정보산업에 대한 관심은 범국가적으로 급속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와대의 관심은 유별났다. 어느날 전두환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정보화사회가 무엇인가』라고 물은 적이있었다. 물론 급작스런 질문은 아니었다. 평소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오던 터라 이 비서관은 준비해 뒀던 답변이 있었다.

『경제사회 발전의 중추적인 원동력은 이제까지는 물질과 에너지라는 2대요소였습니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여기에 정보라는 것이 추가돼 3대 요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정보가 물질과 에너지보다 상위 개념으로 부상하게 돼 결국은 정보화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보화사회를 추진해야 하는가?』『정보산업을 육성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사료됩니다.』『정보산업이 무엇인가?』

『컴퓨터와 관련된 산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컴퓨터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며 전달시키는 분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알기 쉽게 설명해 봐, 요즘 학생들 교과서에는 컴퓨터나 반도체 얘기가 나오나?』
대통령의 정보산업이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그가 취임 직후부터 전자산업과 함께 정보산업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가졌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정보산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데다 82년 이후 관련 부처 장관들도 부쩍 정보산업을 경제 발전에 연동시켜 한다는 식의 동향 브리핑이 늘고 있던 때였다.

대통령은 취임 초기 컴퓨터에 대해 호기심에 가까운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담당 비서관은 틈이 나는 대로 『컴퓨터는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성돼 있으며…』 하는 식의 별도 교양시간을 마련하곤 했다.

87년 퇴임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대통령은 총무처가 주관한 한 행정전산업무개발 시범 행사장에 참석했다가 퇴임 후에는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배우고싶다며 퇴임 후 포부를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컴퓨터에 대해 대통령이 그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담당 비서관의 교양 때문이었다는얘기가 농반진반으로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컴퓨터에 대한 대통령의 지대한관심 때문에 일어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한 83년 1월 28일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는 그후속조치로 2개월 이내에 정보산업 육성방안을 마련, 대통령에 보고하기로돼 있었다. 과기처, 체신부, 상공부 등 관련부처 실무자들 비롯해서 한국과학기술원 연구원들과 업계 전문가들이 이 보고서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보고서 작업은 그러나 쉽지 않았다. 최대 난제는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것인가가 아니라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였다. 그도그럴 것이 보고서팀이작업에 앞서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받은 지시사항은 무조건 이해하기 쉽게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보고서팀에 참여했던 K씨의 회고.

『난감했습니다. 사무자동화니 교환장치니 하는 용어들은 그런대로 가능했지만 예컨대 컴퓨터의 표준화니 정보교환용 코드니 하는 용어들은 표현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표준화라는 용어는 보고서 내용의 핵심이었는데 정보산업 육성을 위한 선결과제로 컴퓨터의 표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죠. 당시 국내에는 한글코드만 38종, 키보드 배열종류만 34종이나 되는 등 규격이 납립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이 이 말을 이해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도를 찾았지요.』

K씨는 이때 표준화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했다. 서로 언어를 달리하는 각국의 민족 대표들이 모여 국제회의를 하는가상적인 상황을 통해 표준화 개념을 설명하자는 것이 K씨가 낸 아이디어였다. 이어지는 K씨의 설명.

『가령 한, 미, 일, 중 4개국 대표가 국제회의를 연다고 칩시다. 언어소통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데 이의 해결에는 2가지 방안을 생각해볼 수있다는 것죠. 우선 1안은 모든 언어를 1대1로 통역할 수 있는 한영, 한일, 한중, 영일, 영중, 일중 등 6명의 통역사를 두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회의가엄청나게 복잡해집니다. 2안은 표준 공용어를 두는 방안이죠. 유엔총회나 올림픽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예컨대 한글을 공용어로 할 경우 한영, 한일, 한중 등 3명의 통역사만 필요하게 되며 회의 절차나 시간도 훨신 단축할 수 있지요… 또 공용어를 모국어로 삼는 한국의 입장은 얼마나 강화되겠습니까.』

컴퓨터 표준화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서 K씨의 아이디어는 즉각 보고서팀에 채택됐고 최종 마무리된 정보산업육성방안 보고서 내용에 그럴 듯한 그림으로 그려져 83년 3월14일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이 보고서 내용이 대통령을 얼마나 이해시켰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현재 전산망조정위원회가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정책문서로 보존하고 있는 정보산업육성방안 사본의 맨 끝장에는 이 문건을 보고받은 직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대통령의 자필 메모가 첨부돼 있는데 이 메모내용으로 미루어 그 이해 정도를 가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일반 용지(A4기준)크기의 백지에 1백여자 내외 분량의 이 메모에는 컴퓨터나 정보산업에 관련된 문구로는 정보산업기술위원회 위원장을 (과학기술비서관에서) 비서실장으로 격상하라(9월5월 본란 34회 참조)는 대목 외에 전자(정보산업), 콤퓨터, 하드(하드웨어의 약자인 듯), 소(소프트웨어의 약자인듯) 등 단지 4개의 단어만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나머지는 대부분 반도체나부품 관련 용어로 채워져 있었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의 정보산업에 대한 관심도는 대내외에 과시되는 형태로 나타내 보이곤 했는데 아무튼 자의든 타의든 그는 재임기간 동안 전시회등의 행사 현장에 대규모 수행원을 대동하고 참석하는 일을 꽤 즐긴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80년 취임 2개월여 만에 찾았던 한국전자전(KES)을 거의매년 관람했던 일은 관련업계에 잘 알려져 있다.

대통령의 이같은 관심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 가운데 하나가 84년 4월22일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장에서의 정전사건이었다.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는 과기처가 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와관련, 정부의 정보화실현 시책의 하나로 기획된 행사였는데 국내 최초의 컴퓨터경진대회였다는 점에서 이미 1년여 전부터 범국민적인 관심을 모아오던터였다.(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에 대한 내용은 다음 회에서 다룬다) 이날 행사는 경진대회 본선으로서 3백여명의 참가자들은 오전 9시 개회식에 이어 9시20분부터 체육관 바닥에 설치된 각자의 PC 앞에서 경시에 임했다. 예정된 시간(3시간)동안 제시된 규정대로 특정 프로그램을 작성하는내용이었다. 그런데 경시 시작 1시간이 지난 10시 20분경 체육관 전체에 갑자기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불과 1분도 못되는 정전 기간이었지만 경시장은난리가 났다. 1시간 동안 작업했던 프로그램 결과가 정전으로 깡그리 지워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초등부에 참가한 일부 어린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목놓아엉엉 울기 시작했다. 경시장내 참가자들의 아우성과는 아랑곳 없이 10시30분경 또한번의 정전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대회본부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본부 측은 결국 경시 마감시간을 12시20분에서 오후 2시20분으로 늦췄다. 이날에 벌어진 촌극의 또 다른하일라이트는 12시30분경 경시장 내에 공급된 빵과 우유상자들이었다. 참가자들이 경시시간의 연장으로 대회본부 측에 점심을 요구했고 본부 측이 이를수용, 참가자마다 식사대용으로 빵과 우유를 지급했던 것이다.

역사적인 컴퓨터경진대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체육관 정전사태는 어이없게도 청와대 경호실의 무지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날의 정전은청와대 경호원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그날 아침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경시장 방문이 계획되자 경호원들이 대회본부 측의 양해없이 안전 점검을 위해체육관 전기실의 전원스위치를 시험삼아 차단해본 것이었다.

경진대회의 실무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A씨의 회고. 당시 A씨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개발센터 소속 책임연구원으로서 행사용 장비와 기술 지원을 담당했었다.

『대통령의 방문을 통보받은 것은 당일 10시경이었습니다. 잔뜩 긴장하고있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는 거예요. 그당시는 설마 경호원들이 전원 차단시험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그후 두번째 정전 때도 제가 장비지원 등을 담당했는데 1회 때의 악몽이 생각나곤 해서 안정적인 전원공급을 위해 한전에 몇 차례씩 공문을 보냈던 일이 생각납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9.1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6) 방황기 (11) 교육용PC보급 계획-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size:3o3zogsk]

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전후해서 정부가 정보화시책 구현을 위해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국민에 대한 컴퓨터교육과 홍보였다. 83년 1월28일 이정오 과기처 장관의 기술진흥확대회의 동향 브리핑이나 83년 3월 대통령에 보고된 「정보산업산업 육성방안」에도 나와 있듯 교육과 홍보는 정부화 시책이나 정보산업 육성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컴퓨터교육은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차원에서 각급 교육기관이 그 대상이었고 홍보는 정보화마인드 확산이라는 목표 아래 학생을 포함한 일반인 전체를대상으로 했다.

정보화시책을 입안한 주무부처인 과기처는 각급학교 교육과 일반인 정보화마인드 확산을 위해 두 가지 획기적인 행사를 고안해냈다. 예산지원을 통해각 교육기관에 교육용컴퓨터를 보급하는 것이 그 하나고 각종 정부시택을 알릴 수 있는 범국민적 행사를 마련하는 일이 그 두번째였다.

이 아이디어가 구체화돼 나타난 것이 1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교육용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과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개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두 계획은 지금까지도 5공화국 시대의 전형적인 행정만능주의산물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당초 의도가 변질돼 졸속 보급된 5천대나 되는 교육용컴퓨터는 초기부터거의 활용되지 못한 채 고색창연한 고철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하드웨어규격이 미흡했던 데다 실행할 소프트웨어는 태부족이었고 정부 후속지원도더이상 이어지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역시 요란하게 치러진 한두해를 제외하고는 갈수록 축소돼 나중에는 스폰서가 바뀌면서 본래 명칭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행사비용이나 규모가 엄청난 장비를 모두 기업체 부담으로 돌리는 데 따른페단이 발생했고 참가 의의를 느끼지 못하는 참가자의 숫자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교육용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은 사실 정보산업의 해를 계기로 입안된 것은아니었다. 이 계획이 처음 알려진 것은 82년 초 과기처의 새해 업무보고에서였다(7월 28일자 본란 「PC산업의 태동」 참조). 이정오 과기처 장관은 이보고에서 10억원의 예산을 투입, 각급 학교에 5천대의 컴퓨터를 보급하겠다는 원대한 새해 업무계획을 대통령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82년 5월부터 보급 기종을 생산할 업체 선정과 기종 규격작업을벌였으나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이 계획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계기로 일정에 박차를 가해 83년 8월 해당 교육기관에컴퓨터보급이 끝나 일단 마무리됐다.

과기처의 교육용컴퓨터 보급계획은 그러나 졸속행정 탓으로 예산낭비만 초래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사실 이 비난은 보급계획이 입안되던 82년부터 이미 예고돼 있었다. 과기처가 처음 이 계획을 세운 동기는 정보산업과컴퓨터 교육에 대한 정책 주도권를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것, 즉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계획에서였다.

당시 과장 직책으로 이 계획에 관여했던 과기처 C씨의 회고.

『81년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뭔가 참신하면서 파급효과가 큰 것을 찾고있던 때였습니다. 마침 컴퓨터 국산화에 대한 열기가 한창이었는데, 하지만컴퓨터만 국산화하면 뭐합니까. 규모의 경제를 이룰 만한 수요가 생기질 않았는데.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교육용 컴퓨터 5천대 보급이었습니다. 컴퓨터국산화 업체들에 큰힘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컴퓨터 교육 확산이라는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것 같았습니다. 사전에 청와대측에 조율해보니매우 좋은 아이디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산 당국에 대한 조정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러나 두마리 토끼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가대행한 이 프로젝트는 기종 생산업체 선정작업부터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과기처로부터 용역을 의뢰받은 KIET가 규격작업만 하기로 하고 생산업체 선정은 상공부에 맡겨버리는 등의 우여절이 시작됐던 것이다(KIET는 상공부 출연기관이었다). 교육용컴퓨터를 생산 보급하겠다고 신청한 곳은 때마침 컴퓨터국산화 기치를 내걸었던 삼성전자,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삼보컴퓨터, 고려시스템산업, 대한전선, 금성사,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동양시스템산업, 삼성전관 등 13개사나 됐다. 이들은 하드웨어의 구성, 소프트웨어의 내용, 응용프로그램 계획, 주변기기 등 4개 분야에 걸쳐 작성한 「교육용컴퓨터 개발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하고 낙점을 기다렸다. 그러나 제출된 계획서 대부분은 프로젝트 수행계획을 소개한 내용이라기보다는 그때까지 각사가개발중이던 상업용 시제품 규격만을 나열해놓은 것에 불과했다.

상공부는 이들 계획서를 토대로 적격심사를 벌여 이 가운데 삼성전자, 동양나이론, 삼보컴퓨터, 금성사, 한국상역 등 5사를 교육용컴퓨터 생산업체로선정, KIET측에 통보했다. 생산업체를 5사로 제한한 것은 업체당 공평하게 1천대씩 생산하게 한다는 뜻에서였다.

상공부가 심사과정에서 어떤 기준을 두고 업체선정 작업을 벌였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나중에 탈락된 업체들의 불만은 컸다. 어차피 KIET가 새로운규격을 제정할 터인데 계획서에 적힌 시제품 규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얘기였다. 한마디로 심사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KIET는 5사가 교육용컴퓨터 개발 생산업체로 선정된 82년7월에서야 기종의 기본규격을 제시하고 연내에 설계도면과 운영지침서를 제출하라는 일정을 통보하게 된다.

당시 KIET가 제시한 기본규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데이터처리 성능은8비트로 중앙처리장치(CPU) 속도와 기본메모리는 각각 1 및 16 이상일 것, 소프트웨어로는 모니터 프로그램(롬바이오스를 그렇게 불렀다)과 베이식 언어 번역기가 기본이었는데 각각 8 롬에 내장해야 된다는 것 등이었다.

KIET는 이때까지만 83년 신학기 이전에 5천대분의 컴퓨터를 5사에서 각급학교에 보급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 일정은 각 업체들의 이해관계가 얽혀5개월이 넘는 동안 답보상태가 계속됐다. 5사는 기존에 독자 개발해오던 것을 어떻게 하면 추가비용 부담없이 KIET 규격에 뜯어맞출까 하는 궁리만 하다가 허송세월한 셈이었다. 그나마도 83년 8월에나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계기로 관련부처들이 참여업체들에 약속된 일정의 준수를 독려한 결과였다.

제품개발이 끝날 즈음인 83년 초 5사 입장은 또다시 바뀌어있었다. KIET가당초 제시한 규격은 베이식 언어 정도만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성능만을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실제 KIET가 대량 생산에앞서 83년 3월 각사의 개발품에 대해 최종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5사 제품 모두가 기본 규격을 훨씬 초과하는 고급 기종으로 업그레이드 돼 있었다.

5사는 저마다 이 기종을 과기처 납품 외에 추가로 대량 생산해서 독자 시판할 계획을 새워 놓고 있던 터였다. KIET 규격은 애당초 컴퓨터 기능을 흉내만 낼 수 있는 일종의 최소 규격이어서 일반 사용자들이 요구하는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KIET가 처음부터 최소규격을 제시한 것은 빠듯한 예산 때문이었다. 결국 KIET는 5사로부터의 대당 납품가격을 24만원으로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규격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24만원은 과기처 예산 10억원에다 나중에 특별추가된 2억원 등을 합친 12억원을 5천대로 나눈 수치였다.

24만원의 납품가격에 맞출 수 있는 컴퓨터는 당시로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5사는 KIET 규격 준수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이 규격을 크게 상회라는 기종 개발 방침을 굳혔던 것이다. 삼성전자 컴퓨사업부 과장이었던 K씨의증언.

『삼성은 과기처의 계획이 교육용컴퓨터 보급 차원 그 자체보다는 민간업계 수요창출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들은 얘기지만 다른 4사들도 과기처 납품가격은 대당 24만원에 맡추되 실제개발은 50만~60만원대의 시판기종 규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5사는 앞뒤를 재고 있었는데 정부 관계자들만 몰랐다는 얘기죠.』
금성사 OA개발부문 책임자였던 또다른 K씨의 회고.

『최종 테스트 후 시판가격을 계산해 보니 본체 50만원, 모니터 6만원, 카세트 테입 드라이브(보조기억장치) 4만원 등을 합쳐 60만원 정도였습니다.
사정이 이랬으니 5사 모두 과기처 납품분만 생산할 리가 없었지요. 나름대로관납에 따른 적자 매출 보전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5사가 생산한 기종이 「SPC-1000」(삼성전자), 「트라이젬-30」(삼보컴퓨터), 「스폿라이트 1」(한국상역), 「하이콤-8」(동양나이론), 「금성패미콤」(금성사) 등이었다.

이들 5개 기종은 83년 8월까지 전국 90개 상업고등학교, 10개 직업훈련원, 17개 각급 공무원교육에 골고루 배분됐다.

하지만 속칭 「차 떼고 포를 떼서」 24만원에 맞춰 납품된 컴퓨터가 제대로 쓰여질 리 만무했다. 당시 한 컴퓨터전문지 기자였던 P씨의 회고.

『누가봐도 사용이 불가능한 장난감 컴퓨터였지요. 더욱이 당시 컴퓨터 환경에서는 프린터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 등 다른 보조기억장치 등을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비용이 1백20만원~1백50만원이나 됐습니다. 재정이 빈약한 상업학교나 직업훈련원에서 엄두를 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나 과기처는 교육용컴퓨터 보급계획이 마무리된 83년 8월 이후 단 한차례도 이에 대한 보완책이나 추가지원책을 발표한 적이 없다. 물론 과기처입장에서도 이미 마무리된 것을 보고된 사업을 재검토하거나 보완할 만한 여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83년 9월부터 과기처는 새로운 계획 시행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10월부터 시작된 제1회전국 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예선이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9.19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7) 정착기 (1) 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size:3o3zogsk]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우리 컴퓨터 역사에서도 하나의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누구도 성공을 자신하지 못했던 양대 스포츠 행사의 전산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나라의 컴퓨터산업은 거듭났다. 정보화사회 진행속도에도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다.

컴퓨터업계에서는 지금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릭픽 전산프로젝트를 「단일 프로젝트로는 최대규모」로 친다. 체육계에서도 이 양대 전산 프로젝트의 성공을 「스포츠과학의 새로운 장」이 열린 계기로 여기고 있다.

86 및 88 전산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서울이 올림픽개최지로 결정됐다는 바덴바덴발 뉴스의 생생함이 채 가시지 않은 81년 가을이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이원경(전 외무부장관)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부설 전산개발센터 소장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를 광화문 조직위 사무국에서 처음 만난 것은 10월 어느 날이었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나 현재 준비 중인 LA올림픽(84년)에 버금갈 88 올림픽전산시스템을 국내 기술로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현재 기술만으로도 올림픽 때까지 훌륭한 전산시스템을 개발할수 있습니다. 올림픽전산화는 우리나라 정보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으로 자신합니다. 이 영향력 때문에라도 외국 기업들에 이 프로젝트를 맡기면 않됩니다.』

『그렇다면 성소장께서 올림픽 전산화에 대한 기초조사를 좀해주시오.』

이원경 총장과 만난 직후 성기수 소장은 즉시 선임연구원 이단형(현 시스템공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팀장으로 하는 올핌픽 전산시스템 개발 기초조사팀을 만들었고 82년부터 본격 활동에 나섰다.

이 조사팀에 대한 예산지원은 그러나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아닌, 과기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비를 부랴부랴 끌어온 것이었다. 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도 조직위 측은 당장 필요한 비용을 82년도 예산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던 것이다. 전후 사정을 감안해 보면 두 사람의 만남에서 이원경 총장은 단지 88올림픽전산시스템의 윤곽 정도를 알아보고 싶어한 반면 성기수 소장은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었던 얘기가 된다.

막 출범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서는 다른 업무에 비교해서 전산시스템의 개발계획 수립이 그리 시급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직위 측은 여차하면 84년에 치뤄질 LA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올 심산이었다. 실제로 LA올픽에서는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미국회사를 동원해서 개발한 경기결과처리시스템( SIJO)를 들여와 약간 수정해서 사용할 판이었다.

그러나 국내최고 권위의 엘리트 기술집단을 자부하고 있는 KAIST 전산개발센터 측 입장은 달랐다. 88올림픽전산시스템을 자체 개발하는 일은 절대절명의 과업이었다. 무엇보다도 KAIST의 기술개발 능력을 대내외에 평가받을 수 있고 88년 이후 차기 올림픽전산시스템 수주 가능성 등 세계무대 진출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KASIT를 출연연구소로 거느리고 있는 과기처 입장 역시 성 소장 말대로 프로젝트 를 성공적으로 추진했을 경우 국내 정보산업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KAAST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간 시각 차가 결정적으로 깊어진 것은 83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88올림픽에 이용할 전산시스템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했고 자체적인 연구조사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이해 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막바지 준비작업에 도달한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에 SIJO에 대한 정보제공을 요청했다. 일단 어떻게 돌아가는 시스템인가가 궁금했고 직접 개발한다면 자문도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의 답변은 의외였다. SIJO에 대한 견학이나 정보 제공을 조건부로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조건이란 LA올림픽조직위원회가 그랬던 것처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도 SIJO를 그대로 인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는 흑자 올림픽을 위해 갖가지 묘책을 마련 중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SIJO를 차기 올림픽조직위원회에 판매한다는 계획이었다.

88올림픽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이 『과연 치룰 수 있을까』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던데 바덴바덴의 결정이 있기까지 고비 때마다 미국의 도움을 받은 바 있어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서도 LA 측의 이같은 조건은 그리 무모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올핌픽조직위원회에 기술 담당으로 특채됐던 H씨의 회고.

『조직위 관계자 다수가 SIJO의 도입을 찬성하는 쪽이었어요. 게다가 고위층 역시 전산시스템 때문에 대세를 그르칠 필요가 있느냐는 시각이었죠. 올림픽을 치룬 경험이 전무한 데다 치안문제 등으로 안팍의 시선이 비판적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성공 여부도 불투명한 전산시스템을 자체 개발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몇 차례 올림픽을 치른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었죠.』

이에 대해 KAIST측은 나름대로 반론을 폈다. 당시 기초조사팀으로 활동했던 C씨의 회고.

『KAIST측은 82년부터 착수한 기초 연구조사 분석을 통해 SIJO가 이미 70년대의 낡은 컴퓨터 사상에 의해 설계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술 자체가 낙후된 것이었어요. 조직위 측에 구입 자체가 부당하고 에산낭비만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 결과를 제출했습니다. 덧붙여서 KAIST가 확보하고 있던 기술이 오히려 앞서 있음을 부각시켰죠. 사실이 또한 그랬구요.』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KAIST전산개발센터에 절대 불리하게 이끌어지고 있었다. 83년부터 본격화된 88올림픽 방송 중계권 협상만 해도 그랬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은 최고의 흥행권을 쥔 미국의 방송사들과 거래를 통해 SIJO구입 조건을 중계권 협상에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압력을 가했곤 했던 것이다.

SIJO의 도입과 자체개발을 놓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KAIST가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을 때 서울의 한 신문은 역대 올림픽 전산시스템 개발과 운영 사례를 모아 분석한 기사를 통해 사실상 조직위 측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세인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전산시스템의 잦은 고장으로 기록이 자주 번복되는 등 운영에 큰 문제점을 드러냈던 68년 멕시코시티, 76년 몬트리올, 80년 모스크바 대회의 실패 이유를 주최국의 과학기술적 역량 부족으로 돌렸던 것이다.

일이 이처럼 불리하게 돌아가자 KAIST 전산개발센터는 방법을 바꿔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자체개발할 수 있는 기술과 노하우를 실증해 보임으로써 조직위를 설득해나가기로 했다. 기초조사팀에 참여했던 A씨의 회고.

『누구나 쉽고 아주 가깝게 접할수 있는 사례에서 기술과 노하우를 실증해 보이기로 했습니다. 우리팀은 그해 10월 인천에서 64회 전국체전이 열린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종목수나 운영면에서 전국체전이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라는 점을 착안해내기에 이르렀죠. 우선 체전 전산시스템을 개발해서 운영해보는 과정을 통해올림픽전산시스템의 실체와 KAIST의 기술수준을 증명해보일 셈이습니다.』

이같은 아이디어는 과기처로부터 『매우 적절하다』라는 반응과 함께 특별 예산지원까지 약속을 받아냈다. KAIST전산개발센터는 이에 앞서 이미 다양한 루트를 통해 몬트리올 올림픽, LA 프레 올림픽, 뉴델리 아시안게임, 에드먼튼 유니버시아드 등 이미 치뤄진 세계적인 스포츠행사의 전산시스템 자료를 수집, 분석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이같은 지원과 기초조사를 토대로 전산개발센터는 인천 체전 개막을 불과 3개월 앞둔 83년 7월 전국체전 전산시스템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인천시청의 당초 계획은 각종 전자 운영시스템 총괄사업자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를 통해 각종 하드웨어 기반의 전자시스템 정도를 도입하려던 수준이었다. 이를테면 광섬유 선로를 이용한 페쇄회로TV, 팩시밀리 네트워크, 사설교환기( PABX) 등을 설치 운영하는 것이었다.(KAIST 전산개발센터는 나중에 KIET의 위탁연구기관으로서 체전전산시스템의과 28개 종목의 경기결과처리 및 관련정보 제공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선다.)

42개 경기장에 설치된 단말기를 통해 집계된 경기결과를 서울 KAIST전산개발센터의 대형컴퓨터 IBM 3032로 전송해서 처리하고 그 결과를 다시 각 경기장의 단말기, 전광판, 프린터 등에 내보내는 방식의 체전전산시스템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다. 일반인들로부터도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TV 등 언론은 인천 전국체전 두고 88올릭픽을 앞두고 치뤄진 에행 올림픽 체전 또는 올림픽전산시스템 점검 체전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인천체전이 끝난 직후인 83년 10월 어느 날 성기수 소장은 광화문의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국에서 노태우 위원장과 자리를 마주했다. (인천체전 전산시스템의 성공적 운영을 확인한 조직위 측이 이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날 만남은 그렇게 구체적인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있습니까?』

『자신있습니다.』

『국내 개발로 결정했으니 책임지고 수행해 보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0.10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8) 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size:3o3zogsk]

83년께 세계 PC업계는 애플, 탠디, IBM, 오스본, 쿠퍼티노, 코모도어, 아타리, 타이멕스 등 10여개 미국 회사들이 군웅할거하던 시기다. 그러나 이들이 공급하는 PC는 모두 독자적으로 설계된 것들이어서 타 기종과의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결여돼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10여개사 외에 또다른 세력으로는 이른바 호환기 생산업체들이 있었다. 수적으로 전체 컴퓨터업계의 99.9%에 해당됐던 이들은 그러나 독자개발 능력이 없어 애플이나 IBM 등을 복제생산하는 호환기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83년께는 국내에서도 십수개의 기업이 국산 컴퓨터 제조라는 명목으로 PC사업에 뛰어들던 시기였다. 물론 국내기업의 목표는 대규모 개발비 투자와 기반기술이 요구되는 독자기종보다는 호환기 쪽이었다.

이들이 생산한 호환기를 놓고 장래성과 타산성 등을 저울질해 보던 대상은 크게 국산 교육용 컴퓨터계열, 애플컴퓨터의 「애플II」계열, IBM의 「IBM PC/XT」계열, 그리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와 일본 아스키사가 규격을 공동 설계한 「MSX」계열 등 대략 4가지로 압축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교육용 컴퓨터계열은 (본란에서 여러번 언급했듯) 삼성전자, 금성사,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삼보컴퓨터 등 5사가 1천대씩 모두 5천대를 생산해 각급 학교에 납품키로 한 PC다. 그러나 회사마다 하드웨어 규격이 제각기 달랐고 설계 사상도 70년대의 마이크로컴퓨터 개념을 도입한 것이어서 굳이 호환PC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열이 업계의 저울질 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교육용 컴퓨터 계획 자체가 컴퓨터산업을 부양하기 위한 국책 프로젝트였다는 점때문이었다.

70년대 말부터 이른바 「애플신화」를 창조해낸 애플컴퓨터의 애플II계열은 초창기 국내에서 삼보컴퓨터 등 전문업체들이 가세하기는 했지만 청계천 세운상가 등 50여개 중소기업에 의해 생산, 보급돼 인기를 모았다.

애플II계열은 무엇보다도 패키지화된 DOS 운용체계와 6800과 같은 최신식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택하는 등 세련된 규격감각이 돋보여 설계기술 면에서 국산 교육용 컴퓨터보다 2∼3년 정도 앞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품의 조립만으로 복제가 가능했던 것도 바로 세련된 규격감각때문이었다.

IBM이 애플II의 성공에 자극받아 발표한 것이 81년의 「IBM PC 5150」이고 이를 16비트로 업그레이드해 82년에 발표한 기종이 「IBM PC/XT」이다. 이 기종에서 유래된 PC라는 말은 이 때부터 일반인 사이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PC/XT는 8비트 애플II를 한차원 상위기종으로서 마이크로소프트의 「PC-DOS(MS-DOS)」 운용체계와 인텔의 80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용하고 있었으며 설계가 정교하고 호환성과 확장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고 있었다. PC/XT의 성공으로 컴팩, 델, 제니스 등 미국 내에서만 수백여개의 호환기 제조업체들이 등장하게 됐다.

83년 말을 전후해 PC/XT 호환기사업에 관심을 보인 곳은 현대전자를 필두로 금성사, 삼보컴퓨터, 삼성전자, 대우전자, 스포트라이트컴퓨터(한국상역의 자회사) 등 10여개사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83년 창업한 신생 현대전자는 첫해부터 호환PC사업에 적극 뛰어들었고 미국의 자동차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현대 포니」의 명성을 PC분야에 이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 놓고 있던 터였다.

PC/XT 호환기업계의 사업참여는 대부분 미국의 IBM 호환기업체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말이 기술제휴였지 사실은 미국기업들이 설계한 제품을 국내에서 조립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주요 제휴관계로는 현대전자-미시우스, 금성사-OSM, 삼보컴퓨터-PCPI, 스포트라이트-MDS, 대우전자-코로나, 삼성전자-컴팩 등이었다. 이 가운데 컴팩을 제외하면 모두 직원 10여명 내외의 이름없는 벤처기업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대단한 업체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내기업이 생산한 PC는 기술제휴 회사의 상표를 부착,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됐다. 실제 IBM 호환 PC사업은 처음부터 내수보다는 수출을 겨냥하고 시작된 것이었다. 컴퓨터 국산화와 함께 수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시절이었다. 이즈음 한국계 미국기업 텔레비디오가 구로공단에 세계적인 규모의 컴퓨터 CRT 터미널 공장시설을 갖추고 1억달러 이상의 제품을 수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83년 한해동안 텔레비디오를 비롯, 동양나이론, 동양정밀, 한국상역 등 국내기업들이 CRT 터미널분야에서 기록한 수출액이 2억달러나 됐다. IBM 호환 PC사업은 과정이야 어쨌든 CRT 터미널의 대를 잇는 황금 수출분야로 부상한 것이다.

애플과 IBM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중소기업들은 애플II를, 전문업체와 대기업들은 IBM 호환기를 각각 선택함으로써 국내 PC산업이 두 갈래로 가닥이 잡혀질 즈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MSX이다.

MSX는 83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ASCII)가 공동 주창해 제정한 표준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일종의 주인없는 공개된 PC였다. 본체, 키보드, 화면, 주변장치 인터페이스 등 주요 4부분으로 이뤄지는 것은 다른 PC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표준규격은 이 4개 부분의 구성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MSX는 다른 PC들과는 다른 두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기존 PC들과 달리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생산회사는 달라도 하드웨어 규격만 준수해주면 얼마든지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플로피 디스크의 경우 디스크 형식만 표준에 부합된다면 어느 회사의 것을 사용해도 무방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IBM이나 애플과 달리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규격에 대한 권리를 고집하거나 직접 생산하지 않고 이를 업계에 공개해 버렸다는 점이 꼽혔다. 원한다면 누구든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규격을 공개한 것은 애당초부터 하드웨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MSX기종에서도 실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 공급하겠다는 것이 두 회사의 기본전략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이미 IBM PC용으로 개발했던 베이직, C, 코볼, 멀티플랜, PC-DOS 등 걸출한 패키지들을 MSX버전으로 수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면도날을 팔기 위해 면도기를 무상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이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표준규격 발표 3개월 만에 미국과 일본에서 50여개의 하드웨어업체가 제품을 생산, 시판에 돌입했을 만큼 MSX는 빠른 속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미국과 일본에서 MSX열풍이 일자 국내에서는 83년 11월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3사가 여기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MSX 생산업체들이 산요, 마쓰시타(내셔널), 미쓰비시, 소니, 야마하 등 가전업체 일색이었던 것처럼 국내 가전3사의 참여결정 역시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는 애플II와 PC/XT가 양분해버린 PC시장에 후발인 MSX를 조기 진입시키기 위한 마케팅전략으로 이른바 가정용 컴퓨터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었다. MSX를 사무실의 생산성 향상도구로서가 아니라 가정에서의 취미오락용이나 가사보조용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제품에 대한 명칭도 애플과 IBM이 개인용 컴퓨터라며 두루뭉수리하게 불렸던 것과 달리 가정용이라는 뜻의 홈(home)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여 「홈 퍼스널 컴퓨터」라는 별칭을 사용했다.

국내 가전3사가 경쟁적으로 MSX 생산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이때문이었다. MSX를 가전과 컴퓨터의 중간쯤으로 보았던 데다 치열한 기업경쟁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3사 가운데 MSX사업 참여를 계기로 컴퓨터분야에 진출키로 한 대우전자의 경우 스탠퍼드대학 박사 출신 안경수씨(전 삼호물산 대표, 현 한국후지쓰 대표)를 본부장으로 영입하면서 전격적으로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가전3사에 MSX사업에 대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 곳은 큐닉스 사장이던 이범천씨(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대표, 현 큐닉스컴퓨터 회장)였다.

이에 앞서 큐닉스는 83년 초 국내기업 사이에서는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매출액 5천만달러의 마이크로소프트와 기술제휴 겸 에이전트 계약을 맺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83년 말 마이크로소프트 등과의 라이센스 계약에 앞서 3사는 MSX의 국내생산에 대한 내부시각이 저마다 달라 쉽게 사업참여 결정을 내릴 입장이 못됐다. 3사마다 「해볼 만하다」라는 긍정론과 「자체기술 개발경험이 없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선 와중에서 이범천씨의 논리는 사뭇 신선한 것이었다.

『국내 PC시장이 그동안 복제 위주로 형성돼 제자리 걸음마를 해왔다면 MSX사업은 컴퓨터 대량생산체제와 소프트웨어분야의 고도화 등 산업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또 사용자에게는 저렴하고 편리한 컴퓨터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20여개 기업이 뛰어들고 있는 것은 유럽과 미국시장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소프트웨어가 충분하고 대량생산체제가 갖춰진다면 수출을 통해 산업규모를 얼마든지 키울 수 있게 된다.』

이범천씨과 큐닉스의 노력은 결국 그해 11월 3사의 최종결정을 이끌어 냈고 4개월 후인 84년 3월부터 완제품이 출하되기 시작했다.

MSX는 국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 같던 IBM 호환 PC시장을 주춤거리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MSX의 열기는 88년 체신부의 제2차 교육용 PC기종 선정때까지 4년여 동안 국내 PC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결국 치열한 경합 끝에 IBM 호환PC가 교육용 PC기종에 최종 낙점되면서 MSX는 방향을 잃고 시장에서 점점 차취를 감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0.24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39) 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size:3o3zogsk]

1960년대 이후 컴퓨터, 반도체, 통신 등 전자분야 신기술 개발은 대부분 정부 출연연구소가 도맡아 해왔다. 민간 업계의 신기술 개발이 요원하던 70∼80년대 출연연구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정부는 수출대체 또는 수출전략 품목 관련 신기술 개발을 특정연구과제로 지정해서 출연연구소에 맡겼다. 이렇게 개발된 신기술은 곧바로 민간업계에 넘겨져 상품화했다. 80년대 초반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64K D램이나 시분할전전자교환기(TDX-1)의 개발, 교육용컴퓨터 국산화 등의 프로젝트가 대부분 이런식으로 빛을 본 것들이다.

출연연구소들은 특히 전자산업 대국을 꿈꾸어 온 역대 정부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보배로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바로 이같은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정치적 격동기나 정부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출연연구소들의 운명은 수시로 달라졌다. 어떤 때는 출연연구소를 전문 분야별로 대거 출범시켰다가도 어떤 때는 비숫한 연구소끼리 통폐합을 단행하곤 것이다.

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필두로 하나둘씩 출범하기 시작한 출연연구소는 정부의 기초과학 또는 기반기술 확보라는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79년경에는 16개가 활동중이었다. 그러나 80년 말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사회전반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16개의 연구소를 9개로 통폐합 해버렸다.

통폐합된 후 살아남은 9개 연구소는 KIST, 한국에너지연구소, 한국동력자원연구 한국기계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인삼연초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 한국전기기술연구소( KIET) 등이었다. 이 가운데 통폐합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였고 통페합의 칼날이 가해지지 않은 유일한 곳은 KIET였다.

이 가운데 KETRI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가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와 통합한 것이었다. KTRI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KIET와 함께 76년 말 출범한 전자산업 분야 전문 3대 출연연구소로서 한때 트로이카 연구소로 불리웠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 3공화국이 컴퓨터, 전자통신, 반도체 등 3분야를 전자산업의 간성으로 육성하겠다는 방침 아래 출범시킨 의욕적인 연구소였다.(3개 연구소의 출범과정에 대해서는 본란 제24회에서 살펴본 바 있다)

85년 KETRI가 남아 있던 KIET를 흡수 통합한 다음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 부문을 분리해낸 것이 오늘날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이다. 이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왼쪽의 <그림>과 같다.

복잡다기한 조직들이 얽히고 혀 출범했던 ETRI는 이후 단 한번도 통폐합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그 소속이 92년 과기처에서 체신부로, 95년 다시 정보통신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국보위나 5공화국때 통폐합됐던 다른 연구소들은 6공화국 이후 부활을 외치기 시작하면서 90년대 들어 거의 원상복구됐음은 물론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훗날 정부쪽이나 출연연구소 관계자들은 85년 ETRI의 출범을 대해 『76년 이후 거듭돼온 출연연구소 개편바람이 마무리 되고 비로소 첨단 전자통신기술 연구체제가 정착됐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다른 연구소들이 특성과 자율적 역량이 무시된 채 통폐합돼 방황하고 있을 즈음 ETRI의 탄생은 오히려 갈라진 땅을 굳게하는 결과를 가져와 우리나라 전자통신 부문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ETRI의 출범은 당시까지 제각각의 길을 가던 전자(컴퓨터와 반도체) 부문과 통신 부문이 상호 연계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라고도 할 수 있었다. ETRI의 출범은 그래서 전자와 통신이 결합한 제3의 기술 즉, 정보통신 기술의 탄생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TRI의 출범에 앞서 당시 국내외의 컴퓨터, 통신, 반도체 연구 분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우선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은 이미 80년 초부터 5세대 컴퓨터 개발연구에 나서고 있었다. 이런 노력들은 80년대 중반부터 결실을 맺어 일부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하이테크 혁명」의 물결이 체감되던 상황이었다.

국내 언론과 지식층에서도 크게 유행했던 「하이테크 혁명」은 이제까지 하드웨어 위주로 발전해온 산업 구조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고 이 혁명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최첨단 반도체와 통신 기술 이라는 것이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은 『컴퓨터, 반도체, 통신 기술의 결합은 음성, 데이터, 화상 등의 정보를 동시에 송수신하는 종합 정보통신사회를 가능케 하며 소비 패턴도 「정보의 소비」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이즈음 KETRI가 82년 세계에서 9번째로 TDX-1 개발에 성공한 것을 비롯 83년 삼성반도체통신이 KIET의 특정연구과제 개발결과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발표 등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또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현 데이콤)가 출범하면서 통신서비스가 시작됐고 이어 청와대 과학기술진흥확대회의가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하자,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순식간에 하이테크 혁명기에 들어선 것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 반도체, 통신 분야에 대한 투자규모나 기술 수준으로 볼 때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을 간파한 정부는 81년에 작성된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통신기기의 성능과 품질향상을 위해서는 반도체와 컴퓨터의 사용이 필수적임을 직시했고 관련 산업의 지원을 주요 정책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 지원 수준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더욱이 통신부문과 전자부문의 기술 개발이 각각 서로 다른 연구소에 의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상호 기술통합이나 지원체계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KETRI(통신부문)와 KIET(컴퓨터「반도체)의 통합은 사실 이들이 출범한 직후인 77년 말부터 상공부에 의해 논의돼온 것이었다. 당시 3대 연구소 가운데 KIET는 상공부, KTRI는 체신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동자부 소속이었는데 상공부가 이를 KIET 중심으로 통합하자는 안을 냈던 것이다. 물론 이 안은 정보산업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과기처와 체신부의 반대에 부닥쳐 빛을 보지 못했다.

상공부 안은 그러나 80년 11월 국보위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져 KETRI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때 통합된 곳은 KTRI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뿐이었다. KIET가 제외된 것은 국보위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KIET는 정부 예산이 빈약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을 들여와 구미공단내에 설립한 것이었는데 IBRD측이 연구소 통폐합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굴복할 국보위가 아니었다. 국보위는 KETRI와 KIET의 소장 및 감사를 겸임시킴으로써 행정적 차원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출연연구소 운영개선 방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컴퓨터, 반도체, 통신, 전기부문 출연연구소의 소속을 모두 과기처로 단일화 해버렸던 것이다.

두 연구소의 행정 통합체제는 겸임소장이던 최순달(전 과기처장관)이 82년 사임하면서 쉽게 끝이 나는 듯했다. KETRI와 KIET가 각각 백영학(현 ETRI초빙연구원)과 김정덕(현 과기처 연구개발조정실장) 등 두 공학박사를 각각 소장으로 영입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연구소가 다시 통합 절차를 밟게된 것은 KIET가 84년초 정기이사회에서 구미공단내 6만평의 연구시설과 부지를 매각하고 다른 지역에 안정된 연구시설을 확보할 것을 결의하면서 부터였다. 당초 KIET가 구미공업단지에 들어서게 된 것은 고향인 구미에 대규모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미는 고급 연구원들과 그의 가족을 유치하기에 문화적 교육적 환경이 너무 미약했던 도시였다. KIET 내부 사정 역시 신기술개발 연구에 대한 재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연구소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터였다.

이와중에서 KIET는 84년 4월 구미단지 시설과 부지를 금성반도체에 매각하고 KETRI 옆의 5만여평을 사들여 대덕단지로 이전했다. 굳이 KETRI 인근 부지를 사들인 것은 두 연구소의 통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움직들이 결실을 맺어 두 연구소의 통합은 84년 8월부터 과기처에 의해 본격 검토됐고 마침내 그해 12월29일에 열렸던 제4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됐다.

ETRI는 85년 3월26일 대전지방법원에 전두환 대통령을 설립자로 한 설립등기를 마침으로써 그해 5월 정식 출범할 수 있게 됐다. 초대 소장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제2부사장에 이어 말년의 KETRI소장을 하던 경상현(전 정통부 장관)이, 이사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 이우재(전 체신부장관),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이용태(현 삼보컴퓨터 회장)이 각각 임명됐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컴퓨터, 통신, 반도체 분야 연구 활동의 맥은 76년부터 80년까지 KIET, KTRI, 한국전기시험연구소 등 트로이카가 활동하던 제1세대, 81년부터 85년 초까지 KETRI와 KIET가 활동하던 제2세대, 그리고 ETRI가 활동해온 제3세대 이후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0.31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o3zogsk]컴퓨터 파노라마 (40) 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size:3o3zogsk]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를 생산하던 삼성반도체통신(89년 삼성전자로 합병)과 금성사가 72년 제정된 기술촉진법을 들어 이른바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한 한 것은 84년 3월이었다. 보호 요청한 신기술 제품은 「삼성 수퍼마이크로-16(SSM-16)」과 「금성 마이티컴퓨터-5010(GMC-5010)」으로, 양사가 자체 개발한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 제품이었다. 기술촉진법 제정 이후 컴퓨터에 대한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가 제출된 것은 전자산업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당시 금성중앙연구소에서 「GMC-5010」의 개발을 지휘했던 K씨(현재 미국거주)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기술이 세계적으로 보편화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국산화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개발기술 자체를 정부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보호요청서를 제출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보호대상으로 지정되면 해당 신기술 제품은 정부기관 등에서 컴퓨터를 구매할 경우 우선 구매되는 특전을 얻을 수 있었죠.』

대상 제품 가운데 「SSM-16」은 82년 과학기술처의 기업주도 특정연구개발과제로 선정돼 삼성반도체통신과 출연연구소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방승양 박사(현 포항공대 교수)팀이 2년 동안 공동 개발한 것이었고 정부예산을 포함, 모두 22억원의 총 연구개발비가 투입됐다. 이 제품은 모토롤러 68000(10) 기반의 주기판과 입출력 보드로 이루어진 하드웨어에 미국 AT&T의 유닉스 운용체계 「시스템 버전릴리스7(SVR7)」을 이식한 것이었다.

「GMC-5010」 역시 82년 과학기술처 기업주도 특정연구사업의 일환으로 금성사 중앙연구소와 KIET의 방승양 박사팀이 2년여에 걸쳐 공동 개발한 것이었다. 투자된 총 연구개발비는 10억원이었다. 이 제품은 「SSM-16」과 달리 인텔 8086(8) 기반의 주기판에 PC 운용체계인 「CP/M」과 「PC DOS」(MS DOS의 IBM 버전)를 이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특정연구에 투입된 정부 예산비율은 「SSM-16」이 30%(6억여원), 「GMC-5010」이 70%(7억여원)나 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과기처와 문교부가 추진한 교육용 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에 1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이같은 연구개발비 규모는 단일 프로젝트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제출된 보호요청서에서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는 자사 제품에 대해 각각 2가지씩 신기술 보호를 신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었는지, 보호를 신청한 2가지 신기술의 내용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2가지 신기술 가운데 하나는 하드웨어 설계에서 시험까지를 국산화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 운용체계를 자체 설계한 하드웨어에 이식했다는 것이었다.

두 회사의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가 접수되자, 과기처는 아연 긴장했다. 보호요청서가 접수됐다는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요청서 제출은 오히려 과기처측과 사전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아이디어는 과기처가 먼저 서둘러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정보기술관과 소속 사무관이던 P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과기처 입장에서 보면 10억원이 훨씬 넘는 예산을 투입해 개발한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갓 시제품 수준을 벗어난 「SSM-16」과 「GMC-5010」이 성능과 지명도에서 외국 제품과 경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따라서 과기처는 특정 연구에 참여한 기업에 정부기관 등에 대한 판로를 확보해줌으로써 최소한 투자비 정도는 회수할 수 있게 할 요량이었던 겁니다.』

과기처의 최대 관건은 접수된 요청서에 대해 과연 주무장관(경제기획원, 상공부)의 찬성 소견을 얻어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주무장관들의 소견은 반대입장일 것이 분명했다. 기술개발촉진법 시행령 (당시 81년 2차개정본) 제10조 규정에 따르면 국산 신기술 제품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 여부에는 주무장관의 의견을 미리 듣게끔 돼 있었다. 물론 이 때 주무장관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보호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하지만 기존 폴리에스테르 필름이나 단열재 등의 경우에서 보여진 것처럼 주무장관의 의견은 제품의 판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과기처는 84년 4월 한달 동안 두 회사가 보내온 보호요청서를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KIET 등 연구소와 대학 등에 보내 기술적 자문을 얻었다. 그런 다음 그해 5월 말 관계부처와 단체 관계자 및 전문가의 의견을 검수하고 통합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관계부처란 물론 경제기획원과 상공부였다. 단체 대표로는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를 회원사로 거느린 한국전자공업진흥회 관계자가, 전문가 대표로는 KAIST와 KIET 연구원을 비롯한 대학교수들이 참석했다.

한편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는 앞서 접수시킨 보호요청서에서 직시한 2가지 신기술에 대한 다양한 보호방법을 제시해 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정부가 일정기간 동안(2∼5년) 자사 제품과 유사한 외국기종의 수입 및 중복 제조를 규제해 줄 것과 유사기술의 도입을 금지해 줄 것 등이었다. 이같은 요청은 사실상 정부가 두 회사를 제외한 나머지 민간 컴퓨터회사에 대해 일정기간 동안 관련사업을 중지시켜 달라는 것과 같았다.

수입규제 등의 요청에 대해 두 회사가 제시한 이유도 그럴 듯했다. 우선 정부가 앞장서 국산 신기술을 장려하고 외화를 절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좀 더 궁극적인 것은 엄청난 규모의 투자비를 회수하고 판매시 적정 이윤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84년 5월 말 과기처 회의실에서 각계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던 의견 검수 및 통합과정은 예상대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각축장이 되고 있었다.

먼저 발언에 나선 전문가그룹은 뉘앙스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삼성과 금성의 신기술 보호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타당론을 펼친 전문가 중에는 「SSM-16」이나 「GMC-5010」의 개발에 참여했던 이도 있었다.

『물론 신기술이라는 의미의 기준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번 제품은 개발과정이 처음부터 국내기술로 이루어진 점을 높이 살 필요가 있다. 특히 막대한 연구비와 인력을 투자해 일궈낸 운용체계 이식과정은 분명 신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응분의 조치가 따라줘야 할 것 아닌가.』(KIET측 P박사)

컴퓨터의 도입(수입)심의를 관장해 온 상공부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상공부는 줄곧 국내 컴퓨터산업의 다양화와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제품수입과 기술도입을 자유화하자는 원칙론을 고수하며 수입규제와 기술도입 금지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AT&T 유닉스 소스코드는 세계 어느곳에서든지 자유롭게 구할 수 있으며 이를 하드웨어에 이식하는 기술도 이미 보편화돼 있다. 그런 기술을 특정연구개발 결과라 해 보호하자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또 유사기종의 범위에 대한 규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들이 제시한 보호방법보다는 다른 지원책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L서기관)

30만달러 이하의 컴퓨터에 대한 도입(수입)심의 업무를 대행하던 상공부 산하단체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역시 아무래도 상공부 의견을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회원사 입장을 거스를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몇년 전부터 10만달러 이하 16비트 컴퓨터의 수입은 규제하지 않고 있다. 유사기종의 수입규제는 수입업자가 도의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본다.』(P이사)

변수는 예산배정과 공정거래 등의 정책과 관련된 경제기획원이었다. 과기처가 줄곧 「SSM-16」과 「GMC-5010」에 채용된 신기술의 영향력과 파급성과에 가치를 두고 있었던 데 반해 경제기획원은 두 제품이 신기술 보호조치됐을 경우 국내외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점을 두고 있었다. 결론은 완곡한 반대였다.

『수입규제는 수입자유화시책에 역행하며 중복제조 규제 역시 자율경쟁체제에 위반된다. 컴퓨터 기술도입을 막아서도 안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두 제품을 정부가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두 제품은 이미 정부가 상당수 예산을 지원함으로써 보호받지 않았는가. 또 세제감면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는가. 이미 보호받고 있는 제품을 중복 보호한다면 특혜의혹을 살 것이다.』(C사무관)

이같은 의견수렴은 그러나 형식에 그치는 것이었다. 84년 7월 3일 과기처는 역사상 최초로 두 민간기업이 신청한 컴퓨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에 대해 「보호키로 결정했음」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뒤따른 보호조치로는 「SSM-16」과 「GMC-5010」에 대해 「정부 및 투자기관 등에서 우선 구매토록 조달청장에게 요청」하는 것이었고 그 기간은 「조치일로부터 1년」으로 정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SSM-16」과 「GMC-5010」의 신기술 제품 보호조치는 5공화국 후반에서 6공화국 초반에 본격화된 국가기간전산망 시스템 구매과정이나 중형 컴퓨터(타이컴) 개발정책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음은 물론이다.
〈서현진 기자〉

사족:「SSM-16」은 그 후 삼성그룹이 중형 컴퓨터 개발을 전략분야로 꼽은 데 힘입어 「SSM-32로 업그레이드되는 등 제품수명이 연장됐으나 「GMC-5010」은 판매실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단종됐다.

작성일자 : 1996.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