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파노라마 [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5 (끝...)

예전에 읽었던 "컴퓨터 파노라마" 란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국 컴퓨터사를 정리한 기사인데… 한동안 기억속에서 잃어 버리고 있다가 오랜만에 하드디스크를 정리를 하면서 찾아냈습니다.
이제는 전자신문 사이트에서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여러분들과 공유를 하고 싶어 올립니다.
혹시나, 저작권등의 문제가 있을시에는 "주인장님…" 삭제 부탁 드립니다.

=================================

[size=150:339edp4e]컴퓨터 파노라마[/size:339edp4e]

차례
1.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2.도입기 (1) 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
3.도입기 (2)
4.도입기 (3)
5.도입기 (4) 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
6.적응기 (1) 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
7.적응기 (2)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
8.적응기 (3) 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
9.적응기 (4) 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
10.적응기 (5)
11.적응기 (6) 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
12.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
13.적응기 (8) 최초의 국산 컴퓨터 「세종1호」
14.적응기 (9) 한국IBM의 터잡기
15.도약기 (1) 대학의 고급인력 양성
16.도약기 (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17.도약기 (3) 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
18.도약기 (4) 삼성전자와 휴렛패커드
19.도약기 (5) 컴퓨터 국산화의 세가지 갈래
20.도약기 (6)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과 마이크로컴퓨터
21.도약기 (7) 충북도청 행정정보시스템 시범사업
22.도약기 (8) 전경련 보고서와 과학기술처
23.도입기 (9) 컴퓨터 원격탐사로 섬을 발견하다
24.도약기 (10)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대 전자관련연구소
25.도약기 (11)
26.방황기 (1) 컴퓨터 도입 승인기준이 마련되다
27.방황기 (2)
28.방황기 (3) PC산업의 태동
29.방황기 (4) 체신부의 부상 … 전기통신에 정보통신 접목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
<114전화안내시스템>
<전자식 공중전화기>
30.방황기 (5) 1981년 선거개표 방송
31.방황기 (6) 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나다
32.방황기 (7) 청계천 전자상가
33.방황기 (8)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등장-명필
34.방황기 (9)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
35.방황기 (10) 정보산업 육성과 대통령의 관심
36.방황기 (11) 교육용PC보급 계획-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37.정착기 (1) 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
38.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
39.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40.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
41.정착기 (5) 2.18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42.정착기 (6)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
43.정착기 (7)
44.정착기 (8)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하)-행정망 사업
45.에필로그

[size=150:339edp4e]컴퓨터 파노라마 (41) 정착기 (5) 2.18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size:339edp4e]

5공화국시절인 85년 2월18일에 있었던 개각은 22개 부처 가운데 12개 부처 장관이 경질된 전면 개각이었다. 진의종 총리가 물러가고 노신영 안기부장이 새로운 총리에 기용된 이 개각구도를 놓고 언론들은 대체적으로 「5공화국의 체제 강화」라는 정치적 해석에 거의 이의가 없었다. 전면 개각을 단행한 이 장관의 스캔들이나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라 경제팀이 물갈이된 상황도 아니었다. 경제팀의 경우 경제기획원, 재무부, 농수산수, 상공부, 동자부, 건설부, 체신부, 교통부, 과기처 등 9개 부처 가운데 경질된 각료는 과기처, 체신부, 농수산부 장관 뿐이었다.

그러나 개각 자체가 워낙 정치성이 짙어 미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컴퓨터를 포함해서 정보산업 분야에 국한해 본다면 이 개각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총무처 등 당시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경쟁을 벌이던 4개 부처 가운데 3개 부처의 장관이 새로 기용됐기 때문이었다.

이들 4명의 정보팀 장관 가운데 금진호 상공부 장관만 유임됐다. 신임 과기처 장관에는 육사11기 출신의 김성진 체신부 장관, 체신부 장관에는 이자헌 민정당 의원, 총무처 장관에는 박세직 안기부 차장이 각각 기용됐다. 얼핏보면 매우 평범한 모양새였으나 정보팀 장관 개개인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정치적 배경과 실력을 갖고 있었다. 장관들의 이같은 면모는 아직 독자산업이 되지 못하고 있던 정보산업 주도권을 놓고 4개 부처가 벌여온 정책경쟁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2.18개각 당시는 때마침 대통령 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전산산망조정위원회에 의해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추진 계획이 범부처적으로 수립되는 단계였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에 대한 규모나 의미는 구체적인 계획이 짜여지지 않았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작게는 정보산업에 대한 비전이, 크게는 정보화사회와 국가경쟁력의 관건이 이 사업에 달려 있었다. 84년 12월 행정망 계획이 마련된 이후 중간계획이 작성될 때마다 수시로 핫라인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됐고 이 때문에 과기처와 체신부 등 관계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추진주체에 따라 부처의 존망이 판가름날 지경이었다. 체신부 통신정책국에서 재직했던 서기관 Y씨는 2.18개각 때 정보팀 장관들에 대한 관련부처의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4명의 장관 모두 재직시 강력한 정치적 소신을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체신부에서 과기처로 자리를 옮긴 김성진 장관은 예외적으로 정통 테크노크라트 계열로 분류됐죠. 예비역 육군 준장이었지만 이학박사와 공학박사로서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기도 했었으니까요. 물론 금진호 장관의 경우는 정치적 파워와 업무추진력이 함께 뛰어나 상공부 직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던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이자헌 장관이나 박세직 장관은 추진력과는 별개로 실무분야에서는 해당부처에서 이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실제 체신부의 경우 83년경부터 주된 정책방향이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의 접목으로 모아지고 있었던 터라 장관 역시 실무에 밝은 테크노크라트였으면 하는 바램이 직원들의 정서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은 오명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었는데 그가 워낙 통신분야에 밝아 김성진 장관(현 한국전산원 비상근이사장)을 대신 과기처로 보냈다는 설이 회자되고 있기도 했다.

총무처 역시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마련한 「행정전산망사업 추진계획」이 대통령에 보고돼 이 계획에 대한 보완과 기초조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장관이 바뀌었다. 총무처는 이를테면 국가기간전산망 추진을 위한 전자정보통신팀의 주관부처로서의 새로운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그때까지 사실상 정보산업 영역을 양분해 오던 과기처와 상공부는 비교적 느긋한 입장이었다. 과기처의 경우 전임 이정오 장관(현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역시 실무정책에 밝은 군출신 테크노크라트였으나 추진력에서는 신임 김장관이 앞설 것이라는 기대가 우세했다. 상공부에서도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 5공화국 출범 상공부 차관 경력을 가진 금진호 장관의 유임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다.

2.18개각에 대에 대한 의미는 개각 직후부터 시작된 부처별 새해 업무보고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각 부처들은 2∼3년내에 본격 추진될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이니셔티브를 의식, 요란한 정보산업 육성계획들을 쏟아 내놨다.

개각 후 하루가 지난 2월19일 상공부가 먼저 「85년도 컴퓨터산업 육성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주요 기기 및 부품의 국산화, 국산 컴퓨터 개발 여건조성, 컴퓨터산업의 수출산업화, 컴퓨터 이용기술의 확대, 전문인력 양성 등 5대 시책이 골자였다.

이에 앞서 84년 상공부는 전자산업부문 생산규모를 전년도의 2.5배인 75억 달러로 신장시켰고 26억 달러이던 수출액도 45억 달러로 늘려 놓았다. 당시 대통령의 관심은 온통 전자산업의 확대발전이었는데 금진호 장관이 유임된 것도 바로 이같은 성과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상공부는 5대 시책을 통해 설비투자를 확대하고 국산화 여건와 국제경쟁력을 성숙시켜 컴퓨터부문의 독자산업화를 시도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계획 작업에 참여했던 전자전기공업국 소속 과장이었던 L씨의 회고.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물론 86아시안 게임 및 88올림픽 특수를 앞두고 있었던 상황에서 상공부의 컴퓨터산업 육성계획 수립 방침은 매우 의욕적이었습니다. 우선 국산화 작업을 통해 주요 사업의 이니셔티브를 쥘 요량이었습니다. 84년이 기반 구축의 해였다면 85년은 내실을 기하는 해로 정했지요. 우선 컴퓨터 국산화와 수출을 촉진시키겠다는 방침 아래 이미 전자 부문에서 풍부한 민관 매개역할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를 전면에 내세우기 했습니다. 실제 기업들에 대한 관세 감면, 전자공업진흥기금 지원, 인력양성 등의 업무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상공부가 컴퓨터 육성계획을 발표하자 그로부터 1주일 뒤 이번에는 장관이 바뀐 과기처가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물론 이 계획은 과기처가 84년부터 준비해 오던 정보산업에 대한 중장기 마스터플랜이긴 했으나 『기술 주도의 경제사회 발전을 계획을 적극 펼쳐 나가겠다』고 취임식에서 밝힌 김성진 장관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기도 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10개년 계획은 85년부 94년까지 10년동안 우리나라 정보산업 생산규모를 각각 국민총생산의 25%, 수출액의 20%까지 끌어 올리며 전국 규모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전제로 전국민의 30% 이상이 가정용 컴퓨터 단말기(홈터미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여기에는 또 매년 4백명의 박사와 2천명의 석사를 배출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과기처 정보산업기술국 소속 사무관으로서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에 참여했던 L씨의 회고.

『사실 과기처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컴퓨터가 처음 도입되던 60년대 말부터 정보산업 정책 전담부처로서 위치와 자존심을 지키려 고심했습니다. 사실 과기처가 상공부나 체신부의 견제에 대해 그렇게 크게 신경쓴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언론이나 업계가 앞서 대립적 상황으로 몰고가곤 했죠. 10개년 계획도 그런 차원에서 마련됐습니다. 상공부 등이 미미컴퓨터니, 프린터니 하는 구체적 품목들의 국산화를 실현하겠다는 식의 육성계획을 내놓았다면 과기처는 더욱 포괄적이고 지표적인 육성계획을 내놓아야 된다는 것이 기본 방침워었죠. 이런 관점에서 산업표준 제정이나 저작보호에서부터 음성인식이나 한글처리인터페이스등 기반기술에 이르기까지 산업 파급효과와 연관효과가 높은 분야에 대한 중장기 계획을 정리한 것이 바로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상공부의 컴퓨터산업육성계획이나 과기처의 정보산업 집중육성계획은 그 내용의 표현방식이나 각론 등에서만 차이가 있었을 뿐 각 정책이 지향하는 바나 목적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에컨대 상공부가 민간기업과 공동으로 32비트 유닉스컴퓨터를 단계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것이나 과기처가 90년도까지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시스템의 개발을 완료하겠다는 식의 계획은 내용적으로도 유사할 뿐 아니라 정부 예산 집행 측면에서도 이중 투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장관이 바뀐 체신부가 업무보고에서 내놓은 의욕적인 육성계획 역시 두 부처의 그것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체신부는 85년 업무보고에서 국가기간전산망의 구성추진을 비롯 초고집적반도체(VLSI)와 32비트 컴퓨터의 개발과 전문 기술인력양성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산업육성 계획을 내놨다. 체신부는 이같은 계획들을 85년 3월에 출범한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를 통해 추진함으로써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 주체로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선다는 방침이었다.

아뭏튼 상공부, 과기처, 체신부 등이 2.18개각을 계기로 쏟아 놓은 산업육성정책들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을 계기로 확대발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컴퓨터 산업 분야가 다양한 실험과정을 걷게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1.14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39edp4e]컴퓨터 파노라마 (42) 정착기 (6)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size:339edp4e]

5대 국가기간전산망은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망, 공안망 등을 말한다. 5대 전산망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는 계획은 5공화국 초기인 82년부터 추진돼 86년 12월 31일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통과되기까지 4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87년부터 본격 시행됐다.

이 사업은 컴퓨터 수요의 창출, 체계적인 정보산업 육성정책의 필요성,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정부구현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입안과정에 참여했던 소수 관계자만이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만큼 사업 자체에 도박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또 도처에 극복해야 할 무리수나 난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훗날 사람들이 『이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특수한 정치적(이를테면 5공화국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바꿔 말하면 이 계획의 입안이나 사업 추진과정에서 그만큼 의혹이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오늘날 우리나라 정보산업은 이 5대 전산망사업 추진을 계기로 비로소 독립적인 분야로 면모를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어느 분야에서도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 한 시대가 거듭나는 분수령은 있게 마련이다. 지난해 12월 16일 첫 회를 내보냈던 「컴퓨터 파노라마」는 당초 여기까지를 염두에 두고 1년여 동안 연재해 왔다. 이제 5대 전산망계획의 재조명과정을 통해 컴퓨터 파노라마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것도 이 분수령이라는 의미를 쉽게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본란 44회까지 3회 동안 몇 개의 작은 제목으로 5대 전산망에 대한 얘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1화-「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전야」

85년 가을 정기국회에는 정보산업과 관련된 3건의 입법안이 상정돼 있었다. 국무회의가 의결한 「과학기술혁신 기본법안」과 「공업발전법안」 그리고 여당인 민정당 안으로 제출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 등이 그것이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3개 법안 가운데 과기혁신법안은 과기처, 공업발전법안은 상공부와 각각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산망 보급 확장법안은 당연히 체신부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사실 이 법안은 애당초 체신부가 마련하려 했던 「정보화사회 기반조성법안」이 그 모태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처음부터 관련부처 사이에서 「체신부의 정보산업 독점관리화」라는 의도로 해석되면서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이에 민정당은 그 내용은 그대로 받아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으로 바꿔 여당안으로 확정한 것이었다. 민정당은 때마침 85년 초 치른 12대 총선에서 전산망 보급 관련 입법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었다.

3개 법안 가운데 과기혁신법안은 기존 과학기술진흥법과 기술개발촉진법을 폐기하는 대신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구법들이 산업 측면에 역점을 두었다면 새 법안은 소프트웨어와 같은 기초기술 진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원래는 「정보산업의 육성」과 같은 문구가 일부 조항에 명시돼 있었으나 관계부처간 협의과정에서 삭제됐다. 아무튼 이 법안의 골자는 과기처로 하여금 산업발전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근거를 상당부분 축소시켜 놓은 것이었다.

공업발전법안은 기계, 전자, 철강 등 7개나 되던 기존의 육성법을 통폐합한 것으로 공업의 균형발전, 업종합리화, 공업발전기금의 설치 등이 골자였다. 이 법안 역시 처음에는 상공부의 야심을 그대로 반영, 정보산업정책 관할조항을 잔뜩 명시했다가 다른 법과 지나치게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는 지적에 따라 여러번의 자구수정을 거친 상태였다.

문제는 민정당이 제출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이었다. 국회에 제출된 3개 법안 가운데 유일하게 조항마다 「정보산업」이니 「전산망」이니 하는 문구들이 횡행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골자는 전산망(통신망)과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균형발전을 통해 정보산업을 육성하고 정보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에서는 구체적으로 전기통신사업자의 전산망사업 참여, 전산망 소요기기와 기술의 국산화, 호환성 확보를 위한 표준화사업 전문인력 양성 등 사실상 국가 차원의 정보산업 육성 등이 명시돼 있었다. 폐기 직전에 있던 체신부의 정보화사회 기반조성법안을 20여일 만에 이름만 바꿔 재포장한 것이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이 안을 여당안으로 확정하기 위한 공청회가 열리는 때를 전후해 민정당과 체신부의 밀월설이 나돌았다.

민정당과 체신부의 밀월에 가장 노골적으로 반발한 곳은 상공부였다. 당시 전자전기공업국 소속 과장이었던 L씨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은 체신부가 여당을 업고 내놓은 법이었죠. 상공부에서는 정보산업을 공업발전법에 의해 합리화업종으로 지정해 민간기업에 대한 지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신부가 이를 가로막고 오히려 모든 것을 독점하겠다는 상황이 돼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애당초 상공부 입장에서는 부처의 특성상 정보산업 육성정책 전체를 상징하는 전산망사업을 펼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공업발전법 입안취지에서도 보여지듯이 상공부는 하드웨어를 정책수단으로 정보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도였다.

입장이 아이러니하게 돼버린 것은 과기처 쪽이었다. 여태까지 정보산업정책을 주도해 온 과기처로서는 민정당의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에 상공부보다 더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수순일 터였다. 그러나 과기처는 어찌된 일인지 시종 어정쩡한 입장으로 일관했다. 실무자 사이에서는 분명 민정당 안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공식입장은 언제나 중도였다.

왜 그랬을까. 이 의문점에 대한 단서는 85년 2월 18일 개각때 체신부에서 과기처로 자리를 이동한 김성진 장관이 쥐고 있었다.

체신부 재직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소신은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추세에 따라 정보산업 육성은 체신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해 오던 김 장관이었다. 그러던 그가 자리를 바꿔 해당업무 흡수대상이던 과기처 수장으로 옮겨 앉은 것이었다. 과기처 정보산업기술국 소속이던 L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김 장관은 부임 초기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의욕을 보였죠. 그러나 이 계획은 전임 장관 때 거의 마무리된 것이었고 김 장관은 발표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김 장관의 평소 소신을 잘 알고 있던 과기처 직원들은 한동안 정부 산업 관련조직이나 업무가 대폭 축소되거나 체신부에 이관된다는 설에시달렸습니다. 김 장관의 소신과 관련해 사실로 드러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법안과 관련해서만큼은 일정 부분에 대해 체신부 쪽을 밀어준다는 것이 과기처의 공식입장이었던 거죠.』

한편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관련부처나 업계의 입장은 이 안을 민정당의 국회상정안으로 확정하기 위한 85년 10월 7일 민정당 공청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언론에 지상중계되거나 요약된 기사들의 재구성을 통해 공청회에 참석했던 각 패널들의 입장을 옮겨보자.

『경제정책이 정부에서 민간 주도로 옮겨가는 이 때에 특정 산업을 정부가 나서 육성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조항들이 미국의 통상법 301조에 적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 L 국장)

『정보사회란 모든 사회가 다 같이 흘러가야 되는 것인데 어느 한 부처가 모든 것을 주도해서는 안된다. 부처마다 기능별로 맡아야 할 역할이 따로 있다고 본다. 첨단기술 개발까지를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이 규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기처 기술정책실 C 실장)

『제도나 법규가 부처마다 서로 상치되는 것이 많아 사업자들이 큰 불편을 겪어왔다. 전산망사업에서 부처이기주의 때문에 표준이나 호환성같은 분야에 혼선이 초래된다면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얼마나 큰 손실이겠는가.』 (체신부 통신정책국 Y 국장)

『관련 육성법이 없어 정보산업이 어려움에 처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법 제정에 신경쓰기 이전에 기존의 법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시급한 것은 누가 주도하든가 정부와 민간기업간의 역할분담과 질서체계가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소프트웨어연구조합 P 이사장)

아무튼 85년 가을 국회에서는 과학기술혁신 기본법과 공업발전법만 통과됐다.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은 이듬해 5월에서야 제정됐다. 체신부와 민정당의 의지 그대로였다. 이 법의 시행은 특히 체신부에 엄청난 지위격상을 의미했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추진과정이 곧 이 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체신부 차관으로 전산망 보급확장법 입안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오명 전 체신부 장관은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통과된 직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법이 통과됐으므로 이제 하나의 줄거리가 잡힌 셈입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1.21

[size=150:339edp4e]컴퓨터 파노라마 (43) 정착기 (7)[/size:339edp4e]

행정망, 금융망, 교육연구망, 국방망, 공안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에 대한 세부지침이 처음 마련된 것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85년 5월 청와대에 보고한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안)」에서였다. 87년부터 본격 추진된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직접적인 단서가 된 이 계획안에는 각 전산망에 대한 망별 사업목표와 중점 추진사항, 추진전담기관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다. 행정망의 경우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통신, 운영 등 부문별로 소요되는 예산 추정액이 나름대로 구체성을 띠었고 전산화에 따른 예산절감효과도 분석돼 있었다.

이에 앞서 정부 공식문건에서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계획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83년 12월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청와대에 보고한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에서였다.

각계 2백여 기관 및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작성된 이 계획안은 5대 국가기간전산망을 구성 운영하는 목적에 대해 「국가 전체의 투자대비 효과를 최대화하고 국내 정보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5대 망사업 추진 근거가 바로 이 문구 하나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획안은 또 5대 망에 대한 망별 구성과 포괄적인 운영계획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 계획은 나중에 여러번의 보완을 거쳐 종국에는 원형을 거의 잃어버리긴 했지만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대내외에 공식화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 문건 기초작업에 참여했던 체신부 소속 Y씨의 회고다.

『사실 이 문건은 기존의 몇몇 자료와 소관부처의 아이디어들을 모아 만든 페이퍼워크 차원이었습니다. 이해가 부족했던 국방망의 경우 구체적인 설명없이 「주관부처는 국방부」 하는 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문건이 나중에 구체적인 계획안 작성 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전산망사업 추진 원칙과 기관별 역할을 제시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입니다. 예컨대 전산망 이용자 입장에서 정부부처나 기관은 소관업무 개선에 중점을 두고 전산망 설치나 운영 등 기술사항은 별도의 전문기관이 책임지도록 한다는 조항이었죠.』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같은 해 7월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관련사항」(7월)을 보고한 데 이어 각계로부터 「국가기간전산망 구성, 운영을 위한 제안」 의견청취 과정(10월)을 거친 뒤 이를 토대로 12월 마침내 「국가기간전산망계획(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국가기간전산망」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들 문건 가운데 하나인 「국가기간전산망계획 관련사항 보고」에서였다. 이 문건 제1항에는 「국내 전체 전산화체계는 종국적으로 국방망, 정보망, 행정망(일반행정, 금융, 교육, 기술정보 등)이 포함된 국가기간전산망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 연결하는 것이 바람직함」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기간전산망」이라는 단어의 효시였다. 다시 Y씨의 회고다(Y씨는 당시 정보산업육성위원위 산하 실무위원회 위원이었다).

『바로 이전의 문건에서는 「정부전산화」라는 단어를 사용했었죠. 사실 정부전산화라는 말은 너무 밋밋한데다 당시까지 정보산업을 주도하던 과기처식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을 주장해온 체신부의 입장을 제가 대변해서 전산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됐던 겁니다.』

「국가기간전산망계획(안)」에 대한 첫 보완은 6개월 뒤인 84년 6월 대통령비서실이 중심이 된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추진보고」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5대 망 사업추진에 대한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지침이 마련됐다. 5대 망이 행정망, 금융망, 교육연구망, 국방망, 공안망으로 최종 압축된 것도 이 보고서에서였다.

이 보고서는 또 처음으로 5대 망에 대한 범위를 정해 놓고 있었는데 행정망은 정부 각 원부처청과 지방행정기관 및 기타 공공기관이 포함돼 있었다. 또 국방망은 국방부와 육해공군 및 병무청을, 당초 정보망에서 명칭이 바뀐 공안망은 안기부와 치안본부 및 검찰을 각각 대상으로 했다. 새로 추가된 금융망은 은행과 농협 및 우체국을, 교육연구망은 대학과 연구소 등을 각각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 보고서 내용은 청와대가 5대 망사업 추진을 직접 관장하겠다는 대목에서 정부부처나 산하 관련기관에 큰 파문을 던졌다. 청와대가 당초부터 염두에 두었던 분야는 행정망과 금융망이었다. 행정망의 경우 각 부처, 산하 지방행정기관, 공공기관 등 관련 기관이 부지기수인데다 업무 자체도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업무조정에 난항이 예상되던 터였다. 금융망 역시 마찬가지여서 20개가 넘는 은행 등 금융기관의 상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분야였다. 청와대는 바로 이같은 분야에 대한 조정과 지원을 직접 챙기겠다는 것이었다.

금융망추진위원회 자문회의 위원이었던 과기처 J씨의 회고.

『5대 망 사업은 5공출범 직후부터 구상돼왔습니다. 정권 안보나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이 사업이 추진된다는 애기가 더 설득력 있게 퍼져 있었죠. 청와대의 직접 조정 의지에 행정망과 금융망 관련 기관에서 긴장했던 것은 당시 강압적인 청와대의 스타일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각기관들이 스스로 업무조정을 하지 않을 경우) 청와대의 개입은 불보듯 뻔한 것인데 자칫 대규모 조직개편이나 인사이동과 같은 불똥으로 까지 튈 우려가 다분한 상황이었던 거죠.』

청와대가 5대망 사업 추진에 대한 조정과 지원을 위해 만든 기구가 국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였다. 위원장은 기존 정보산업육성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비서실장이 맡았다. 위원은 소관부처 차관과 청와대 정무2, 경제, 교문수석 등이었다. 한편 앞서 언급했던 85년5월의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전전산망 추진계획(안)」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보고서 명칭에서도 나타나듯 행정망에 대한 비중과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는 사실이었다. 5대 망에 대한 각각의 비중을 동등하게 다뤘던 이전 문건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이것은 행정망이 다른 4개망에 대해 규모면이나 전산화에 대한 상징효과 면에서 행정망이 앞도적인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행정망에 대한 중요성은 이 망을 구축하는데 소요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및 통신망에 대한 표준규격과 기술 국산화가 미치는 파급효과 때문이었다. 즉 행정망 사업에는 엄청난 규모의 장비와 소프트웨어 개발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정보산업 발전의 사활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행정망에서 정해진 각종 표준은 나머지 4대망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판이었다.

실제 5대망 가운데 가장 먼저 사업이 추진된 것도 87년 행정망이었다. 나머지 4개망은 88년과 89년 2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90년부터 본격적인 삽질이 시작됐던 것이다.

행정망의 경우 본격적인 사업 시작은 「전산망 보급 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발표되는 87년1월부터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산망조정위원회가 「다기능사무기기(워크스테이션) 보급계획(안)」을 내놓은 86년 1월부터라고 할수 있었다.

다기능사무기기란 일선 업무에 사용되는 개인용컴퓨터로서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이계획안에서 86년 3월부터 88년3월까지 2년동안 5천1백85대를 각급기관에 보급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대당 2백10만원으로 책정된 다기능사무기기의 관납을 놓고 정보산업계가 바짝 달아올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이 계획안에서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한 언급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당장 필요한 다기능사무기기 구입등 행정망 사업추진에 소요되는 자금 지원에 대한 부문을 명확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 계획이 처음부터 졸속으로 만들어졌다는 비난이 시작된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1.2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39edp4e]컴퓨터 파노라마 (44) 정착기 (8)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하)-행정망 사업[/size:339edp4e]

지난 회에 언급한 것처럼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계획 가운데 규모나 파급효과 면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행정전산망이었다. 정보산업에 대한 정부의 육성의지를 가장 잘 나타내 보이려고 했던 것도 행정전산망이었다. 그런 만큼 행정전산망사업 추진과정은 다른 4대망에 비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사전에 단 한 푼의 소요자금도 마련해 놓지 않고서 사업계획부터 만들어 낸 것이 말도 많고 탈도 많게 된 요인이었다.

행정전산망 사업계획에 대한 종합적인 윤곽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85년 12월 청와대 비서실 경제수석실이 작성한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관련사항 보고」 문건에서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행정망에 대한 추진목표는 「작고 효율적인 정부의 구현」 「전국 어디서나 공평한 정보전달로 주민편의 증대」 「정보산업의 육성」 등 3가지였다. 또 주민관 대상업무로 지정됐다.

일부 사업이 시작되는 86년부터 사업이 마무리되는 95년까지 10년간 소요될 자금은 모두 7천6백7억원이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주전산기는 2백83대, 다기능 사무기기(워크스테이션)는 2만7천9백24대, 전문인력은 2천8백30명이었다. 86년부터 5천대의 워크스테이션이 일선 기관에 보급되고 87년까지 2년에 걸쳐 국산 주전산기와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완료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추진일정도 있었다.

행정전산망사업의 부처별 책임자는 각 부처 차관으로 정해졌고 총괄부처는 총무처, 전체 설계와 기술지원 전담기관은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이 각각 맡도록 했다. 보고서 내용의 백미는 행정망사업에 참여하는 관련 부처가 많고 업무내용이 다양해 종합적인 조정통제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해 놓은 부분이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결국 당분간 이 조정통제기능을 대통령 직속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맡게 된다는 애기였다.

물론 이같은 내용의 보고서가 87년 2월 완성된 최종판 「행정전산망 종합계획(안)」에 1백% 그대로 수용됐다는 것은 아니다. 86년 12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제정되고 난 직후 작성된 「행정전산망 종합계획(안)」은 85년 12월의 보고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으로 자세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보고서 내용 가운데는 후일 행정전산망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결정적인 단서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바로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을 위한 자금조달방안이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1. 소요자금은 행정전산망 전담관리기관(한국데이타통신)을 통하여 선투자하고 행정망 완성 후 사용료로 정부예산에서 연차적으로 상환함.

  2. 행정전산망 소요 컴퓨터시스템의 개발비, 구입비, 운영비의 종합지원이 가능토록 행정망 소요자금지원 전담회사를 한국전기통신공사 자회사로 설립해서 운영.

이 두개 항 가운데 1번 항은 이전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된 바는 있었으나 2번 항은 이 보고서를 통해 처음 제시된 자금조달방안이었다.

행정전산망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나 계획안 내용은 그렇지 않아도 당시 정보산업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던 터였다. 기업 관계자들은 보고서의 자구 하나하나에 의미를 달리할 만큼 신경을 쓰던 터였다. 앞서 설명한 행정전산망사업의 목표에도 나와 있듯이 정부는 정보산업 육성을 위해 행정전산망과 관련해 가능한 모든 부분에 대해 민간업체 참여를 개방할 방침이었다. 당시로서 총소요자금 7천6백억원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더욱이 그 규모만큼의 컴퓨터가 도입되고 소프트웨어가 개발될 경우 파급효과나 연계수요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행계획은 하나도 확정되지 않고 있었다. 기업들의 답답한 심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삼성전자에서 컴퓨터영업을 담당하던 O씨(현재 미국체류중)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기업들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나 청와대 비서실의 일거수 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기업의 관심사는 역시 하드웨어를 국산화해 공급하는 것과 소프트웨어의 수주개발 용역이었죠. 그러나 사실 행정전산망에 소요될 하드웨어가 국산이란 원칙만 정해졌을 뿐 구체적인 규격이나 개발방법은 제시돼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담기관으로 지정된 한국데이타통신 관계자들은 기업들의 집중적인 로비대상이 됐죠.』

85년 12월의 보고서에서 적시된 자금조달방안이 초미의 관심사가 된 사정도 이같은 분위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사실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의 성패는 이 자금조달방안의 실현 여부가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앞서 옮겨 놓은 보고서 내용 1번 항에서처럼 행정전산망사업에 예산의 선투입은 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방침이었다. 물론 그럴만한 정부 예산이 마련돼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야당이나 언론은 『단 한 푼의 예산확보도 없이 무슨 심산으로 행정망사업을 추진하려느냐』며 연일 청와대측에 화살을 퍼부어 댔다.

원래 행정전산망사업 관련 자금조달방안이 처음 문건화한 것은 84년 12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작성한 「행정전산망사업 추진계획(안)」에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것은 그러나 「한국데이타통신이 선투자하면 사업완료 후 정부예산에서 사용료를 지불」한다는 식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언급한 것은 다행이었다. 83년 7월부터 행정전산망 사업추진계획이 대내외에 공표되면서도 청와대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는 각종 문건에서 자금소요 내역은 적시해 놓고 있으면서도 자금조달방안은 제시하지 않아 혼선을 초래했다.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에 대한 청와대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측의 이같은 이중성은 85년 정기국회 예산심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85년 5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의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안)」과 85년 12월의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관련사항 보고」에서는 이미 86년부터 5천대의 워크스테이션을 일선 기관에 보급키로 하는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이같은 일정을 진행시키려면 당장 86년부터 정부예산이 집행되도록 해야 하는데 청와대 등은 85년 정기국회 예산심의안에 워크스테이션 구입비용안을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실제 워크스테이션 보급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어 87년부터 본격적인 보급이 이루어기 시작했다).

85년 12월의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관련사항 보고」에서 제시된 자금조달방안은 본격적인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를 구체화하는 데는 무려 1년이란 세월을 소비해야 했다.

한편 시스템설계와 소프트웨어개발 책임기관인 한국데이타통신은 예산이 확보되지 못해 2년여가 지나도록 행정전산망사업과 관련된 실질적인 업무는 단 한건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용역사업분야는 국가예산에서 배제돼 있었고 예산회계법상 모든 예산은 사전심의를 거친 곳에만 집행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개발결과를 봐야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등 용역사업에는 예산집행을 위한 사전심의나 감리는 어떤 형태로든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행정전산망용 컴퓨터의 개발, 구입, 운영 등 소요자금을 지원할 전담회사를 한국전기통신공사 자회사 형태로 설립하겠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자회사를 통해 모든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것이 청와대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의 기본방침이었다. 한국데이타통신도 사업추진에 당장 활기를 띠었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직접 한국데이타통신에 투자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금투자방식이 나중에 상환받는 금융사업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 정관에는 금융사업을 할 수 없게 돼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86년 11월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백% 출자해 출범한 회사가 한국통신진흥주식회사다. 한국통신진흥은 출범과 함께 86년 76억원, 88년 6백83억원, 88년 7백54억원 등 모두 1천5백13억원의 자금을 한국데이타통신에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역사적인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에 대한 물꼬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86년 12월에는 이같은 정부예산(한국전기통신공사는 엄연한 정부기관이었으므로)을 집행해주기 위한 사전 감리(심의)기관인 한국전산원의 설립이 완료된다.

한국통신진흥주식회사와 한국전산원 설립에 대한 법적 근거는 무었이었을까. 이 근거가 바로 오명 전 체신부 장관이 『이 법이 통과됐으므로 이제 하나의 줄거리가 잡힌 셈입니다』(본란 제42호 참조)라고 표현했던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2.0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39edp4e]컴퓨터 파노라마 (45.끝) 에필로그[/size:339edp4e]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인 95년 12월11일자에 첫 회를 내보냈던 「컴퓨터 파노라마」가 45회째인 이번 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시리즈는 지난 67년부터 86년 말까지 20년 동안의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역사를 연대별로 41개 사건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67년은 「IBM 1401」이라는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해다. 또 86년은 87년부터 시작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추진 계획이 갖가지 역경을 딛고 완성된 해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이 20년 동안의 방황기를 끝내고 비로소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건이다.

이제 97년이면 국내에 컴퓨터가 도입된 지 꼭 30주년이 되는 해다. 본지가 이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것은 바로 이 30주년의 뜻을 되새기기 위한 의도였다. 나아가서는 과거를 되살펴봄으로써 새로 시작될 역사의 징검다리로서 기록을 남기기 위한 욕심도 없지 않았다. 국내에서 아직 이렇다 할 컴퓨터도입 역사가 없었다는 사실은 특히 이같은 욕심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41개의 사건들은 95년 12월11일 게재했던 첫 회 『「IBM 1401」에서 「한글윈도우95」까지』에서 밝혔던 것처럼 객관적인 고증자료나 관련인물의 인터뷰 또는 당시의 보도기사들을 근거로 재구성한 것들이다.

이들 사건은 다시 도입기(67~69), 적응기(70~74년), 도약기(75~79년), 방황기(80~83년), 정착기(84~86년) 등 5개의 주제별 연대기로 다시 분류했다. 도입기는 「IBM 1401」이 도입된 직후 국내외적인 상황을 다루는데 역점을 두었다. 정부, 기업, 일반인들 모두 「컴퓨터는 만능기계」라는 식의 맹목적인 이해 속에 컴퓨터를 바라보던 시각들이 4개의 사건으로 정리돼 있다. 국내에 처음 도입된 컴퓨터가 IBM의 「IBM 1401」인가 후지쯔의 「파콤222」인가를 놓고 벌여온 업계 논쟁도 다뤘다.

적응기에서는 70년 이후 정부기관과 민간기업들 사이에 컴퓨터 도입이 늘어나면서 「컴퓨터를 어떻게 활용했는가」라는 주제 속에 벌어졌던 사건들이 9개로 정리했다. 이 시기에 컴퓨터는 중학교 무시험추첨이나 대학 예비고사 채점작업 등 현실과 가까운 곳에서 아주 편리하고 긴요하고 사용되지만 아울러 AID아파트 부정 추점사건 등에도 깊숙하게 개입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혼선을 가져다준다.

도약기는 비로소 외국에서 만들어져 외국의 문화습관대로 사용돼온 컴퓨터를 「어떻게 국산화할 것인가」가라는 물음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이 물음은 정부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됨으로써 행동에 옮겨졌는데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10개의 사건으로 묶어졌다. 컴퓨터의 진가를 파악한 3공화국이 컴퓨터 중심의 전자입국 정책이 시도되고 미약하나마 정보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됐다. 성기수 박사가 이끄는 KAIST전산센터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거의 모든 기술적 기반을 떠받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컴퓨터 국산화를 놓고 삼성과 금성의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고 이를 지원하게 될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등의 출연연구소가 등장한다. 국산 컴퓨터 1호 「세종」이 이 때 탄생한다.

방황기에서는 80년을 전후한 정치적 혼란이 자생력이 취약한 컴퓨터산업분야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11개의 사건을 통해 다뤘다. 이 시기의 주제는 「컴퓨터가 어떻게 정권안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느냐」였다. 국산화에 배치되면 산업적으로 당장 필요한 컴퓨터도 수입이 금지되는 수난시대였다. 5공화국 후기에 완성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추진 계획도 사실은 이때부터 긴밀하게 논의되던 것이다. 「정보산업의 해」가 선포됐고 전시 행정의 극단을 보여준 교육용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컴퓨터 기술은 이미 총선 당락을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세련돼 가고 있었다. 이같은 상반된 평가 속에서도 정보산업정책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의 밥그룻 싸움은 본격화됐다.

정착기는 우수한 엔지니어들의 대규모 배출과 관계에 진출한 정통 테크노크라트들의 부상에 힙입어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컴퓨터 프로젝트들이 기획되던 시대다.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이 본격화됐고 행정전산망을 포함한 초대규모 국가기간전망망사업 추진계획이 확정됐다. 모두 6개 사건을 다뤄진 이시대의 주제는 「90년대 이후를 위한 정보산업의 육성」이었다. 6개 가운데 특히 청와대가 직접 추진한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계획은 미래 전략산업으로서 정보산업의 육성과 효율적인 행정부 구축이라는 2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범국가적인 관심을 보인 사건이었다. 물론 이같은 프로젝트들의 추진과정에서 돌출되곤 했던 과도한 정치적 긴장감 때문에 나타난 폐혜도 적지 않았다. 5개의 주제별 연대기를 일지로 정리하면 <표>와 같다.

필자가 지난 1년 동안 「컴퓨터 파노라마」를 연재하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컴퓨터는 정직하다』는 사실이었다. 30년 동안을 이어 내려오면서 컴퓨터의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컴퓨터를 다루거나 통치하려 했던 사람들과 정책은 시간에 따라 무수하게 바뀌고 변질된 것은 참으로 안타끼운 일이었다.

대학에서 사용되는 컴퓨터 원론 교과서에는 지금도 이런 명언이 통한다.

「Gold in gold out, Garbage in Garbage out」 (컴퓨터에 금을 입력하면 금을 출력하고 쓰레기를 입력하면 역시 쓰레기를 출력한다). 이 말은 컴퓨터가 오로지 사람이 시키는 일만 처리할 수 있는 융통성 없는 기계라고 비꼬는 것이지만 또 그만큼 오차가 없는 정직한 기계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지난 30년을 돌이켜보건대 우리 정부나 기업들은 컴퓨터에 대해 경쟁적으로 지나친 애정(?)을 보여왔다. 그 결과는 자신에게만 가치가 있는, 그래서 결국은 남들에게는 허섭쓰레기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들만 컴퓨터에 입력한 꼴이었다. 이제와서 그 허허실실이 드러나고 있는 컴퓨터 국산화정책이나 교육용 컴퓨터 보급계획 등은 애정이 넘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바로 이런 것을 되짚어보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기록들을 중시하는 것이다.

「컴퓨터 파노라마」를 끝까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컴퓨터 파노라마」는 독자 여러분의 격려에 힘입어 내년 1월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또 훗날 이 시리즈의 속편격인 1987년 이후를 정리할 계획임을 밝혀둔다. 자료제공과 인터뷰에 협조해주신 여러분께 고마움을 표한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지난 1월 8일자(3회) 본란에서 필자의 부주의로 생존을 바꿔 표기했던 원로학자 최형섭 박사에게도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서현진 기자>

<>국내 컴퓨터도입사 연대기(1961~1986)
도입기
1961년
3월, 내무부 통계국 천공카드시스템(PCS) 1백30대 도입

1964년
5월, 이만영 박사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 개발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출범

1967년
1월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 발족
4월 경제기획원 국내 최초 컴퓨터 IBM 1401도입, 과학기술처 출범, 한국IBM 창립
5월 생산성본부, 파콤222 도입
6월 KIST 전자계산실 발족 및 CDC 3300 도입
9월 과기처, 전자계산조직개발위원회 설치, 컨트롤데이타코리아(CDK)창립
10월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 발족

1968년
4월 과학기술처 공무원 전산교육 실시
5월 유한양행, IBM 1401 도입(민간 최초)
10월 한국유니백 창립
1969년
1월 서강대, 유니백 SS-80도입(대학 최초)
10월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발족, 서울 홍릉에 KIST단지 준공
적응기
1970년
2월 중학교 컴퓨터 무시험 추첨
3월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설치(대학 최초)
4월 과기처산하 중앙전자계산소(현 정부전자계산소) 발족

1971년
3월 스페리랜드코리아(현 한국유니시스) 창립
12월 KIST, 대학예비고사 채점 전산화

1972년
10월 치안본부, 유니백9400도입, 주민등록전산화
11월 외환은행, 서울-부산자점간 온라인 개통(국내 최초)

1973년
2월 한국정보과학회 출범, KIST, 국산 컴퓨터 1호 세종 완성
10월 반포AID아파트 부정추첨사건(최초의 컴퓨터 범죄)

1974년
2월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 창립
도약기
1975년
1월 박대통령, 행정전산화 추진 지시
9월 동양전산기술, 「오리콤540」개발(최초 국산 OEM기종)

1976년
2월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창립
11월 KIST와 금성전기, GSCOM-80A(최초 국산마이크로 컴퓨터) 및 잉크젯프린터 개발
12월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 한국전기기기 시험연구소 발족1977년
10월 문교부, 전국 8개 국립대학에 HP기종 보급
12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발족

1978년
2월 총무처, 행정전산화 기본계획 발표
3월 삼성전자, 한글모아쓰기 CRT단말기개발(국내 최초)
7월 행정전산 시범사업 추진(충북도청)
8월 금성사 컴퓨터사업부 신설

1979년
2월 전경련, 정보산업협의회 발기
9월 KIST, 후지쯔에 국산 소프트웨어 수출(국내 최초)
방황기
1980년
6월 공업진흥청, 컴퓨터와 주변기기에 대한 표준설계 기준 마련

1981년
1월 KIST와 KAIS가 KAIST로 통합
10월 한국전기통신공사 발족

1982년
1월 행정업무 전산화 추진규정 제정
3월 한국데이타통신 발족
10월 공업진흥청, 컴퓨터 표준화 KS규격고시
12월 행정전산화 기본계획 수립

1983년
1월 정보산업의 해 선포
3월 정보산업 육성방안 보고(정보산업육성위원회 구성)
7월 국가기간전산망계획관련사항 보고
9월 KAIST와 고려시스템 공동으로 명필 워드프로세서 개발
정착기
1984년
3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 발족
4월 한국데이타통신, 전자사서함 서비스 실시
6월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추진 보고

1985년
5월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망 추진계획(안)
한국전자통신연구소( ETRI)발족
12월 제1단계 행정망 추진계획 중간보고

1986년
1월 다기능사무기기 보급계획(안)발표
5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제정
12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사행령 제정
공업진흥청, 정보교환용 한글표준코드 확정

작성일자 : 1996.12.1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Copyright (C)1996-97 ETnews All rights reserved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이왕이면 하나로 이어 주시지…

암튼 시간날때 정독해 보겠습니다.

[quote="Vulpes":1e2guk9g]이왕이면 하나로 이어 주시지…[/quote:1e2guk9g] 그러게요…

전 우분투 게시판에도 텍스트 길이 제한이 있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roll:

[quote="하노스":1rwcq9a1][quote="Vulpes":1rwcq9a1]이왕이면 하나로 이어 주시지…[/quote:1rwcq9a1] 그러게요…

전 우분투 게시판에도 텍스트 길이 제한이 있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roll:[/quote:1rwcq9a1]

하나로 올리려고 했는데… 제한이 있더군요… T_T

아니, 제 말은 한 글타래에 이어서 말이에요. 글 하나는 길이 제한이 있어도 글타래는 그런게 없을텐데요.

ㅋㅋㅋ 길군요…

저도 나중에 시간날때 한번 정독해 보겠습니다 ㅎㅎ

[quote="Vulpes":lf4gjyiu]아니, 제 말은 한 글타래에 이어서 말이에요. 글 하나는 길이 제한이 있어도 글타래는 그런게 없을텐데요.[/quote:lf4gjyiu]

그렇네요. . .

담음번에는 알려주신대로 한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