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파노라마 [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1

예전에 읽었던 "컴퓨터 파노라마" 란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국 컴퓨터사를 정리한 기사인데… 한동안 기억속에서 잃어 버리고 있다가 오랜만에 하드디스크를 정리를 하면서 찾아냈습니다.
이제는 전자신문 사이트에서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여러분들과 공유를 하고 싶어 올립니다.
혹시나, 저작권등의 문제가 있을시에는 "주인장님…" 삭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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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size:5t5u836i]

차례
1.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2.도입기 (1) 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
3.도입기 (2)
4.도입기 (3)
5.도입기 (4) 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
6.적응기 (1) 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
7.적응기 (2)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
8.적응기 (3) 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
9.적응기 (4) 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
10.적응기 (5)
11.적응기 (6) 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
12.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
13.적응기 (8) 최초의 국산 컴퓨터 「세종1호」
14.적응기 (9) 한국IBM의 터잡기
15.도약기 (1) 대학의 고급인력 양성
16.도약기 (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17.도약기 (3) 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
18.도약기 (4) 삼성전자와 휴렛패커드
19.도약기 (5) 컴퓨터 국산화의 세가지 갈래
20.도약기 (6)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과 마이크로컴퓨터
21.도약기 (7) 충북도청 행정정보시스템 시범사업
22.도약기 (8) 전경련 보고서와 과학기술처
23.도입기 (9) 컴퓨터 원격탐사로 섬을 발견하다
24.도약기 (10)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대 전자관련연구소
25.도약기 (11)
26.방황기 (1) 컴퓨터 도입 승인기준이 마련되다
27.방황기 (2)
28.방황기 (3) PC산업의 태동
29.방황기 (4) 체신부의 부상 … 전기통신에 정보통신 접목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
<114전화안내시스템>
<전자식 공중전화기>
30.방황기 (5) 1981년 선거개표 방송
31.방황기 (6) 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나다
32.방황기 (7) 청계천 전자상가
33.방황기 (8)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등장-명필
34.방황기 (9)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
35.방황기 (10) 정보산업 육성과 대통령의 관심
36.방황기 (11) 교육용PC보급 계획-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37.정착기 (1) 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
38.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
39.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40.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
41.정착기 (5) 2.18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42.정착기 (6)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
43.정착기 (7)
44.정착기 (8)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하)-행정망 사업
45.에필로그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1) 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size:5t5u836i]

30여년전 도입초기의 컴퓨터들은 인구센서스통계와 더많은 컴퓨터 도입을 위한 활용교육에 집중 투입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컴퓨터가 마치 공상과학 (SF)소설에 나오는 만능기계쯤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컴퓨터의 성능이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매우 초보 수준의 기계였음은 물론다. 이제 컴퓨터는 1가구 1대 시대가 멀지 않았을 만큼 보편화됐으며 기능도 상상할 수없을 만큼 발전됐다. 하물며 컴퓨터를 이용하는 영역의 다양성과 컴퓨터를이용함으로써 변모된 산업 및 개인생활의 모습이란 말할 나위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오늘이 있기까지는 무작정 30여년의 세월이 쌓인 결과는 아니다. 그 세월 동안에는 선각자들의 피나는 의지와 그에 못지않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구하지 않더라도 지나간 역사를 뒤돌아 보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1년 여 동안 연재될 컴퓨터 역사는 3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쌓여진 신문 .잡지.기업사사.연감.정부보관자료 등을 토대로 쓰여지는 것임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차세대 컴퓨터 운용체계 "한글윈도우95"가 발표되던 지난 11월28일 오전 국내 5대 PC공급회사 가운데 하나인 S사의 주식이 오름세를 보였다. 미미한 수준이긴 하지만 이같은 사실은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과 5.18특별법 제정 등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악재가 연속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주가반등이라 는점에서 매우 흥분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국내 PC공급 1~2위를 다투는 S사는 벌써 6개월 이상 계속되고 있는 대기수 요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운 운용체계를 기본 탑재한 PC를 구입하려는 잠재 고객들이 "한글윈도우95"가 발표될 때까지 제품구매시기를 늦춰, 기업경영에 적지않은 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가반등은 바로" 한글윈도우95"가 발표되는 11월28일부터 S사의 주력 품목인 PC판매가 폭발하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예고하는 것이었다.

96년이면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도입된 지 30년 째가 되는 해이다. 어느덧 한세대가 지난 셈이다. 30년 전은 커녕 불과 몇 년 전만하더라도 컴퓨터가, 그것도 자사와는 직접적으로 무관한 소프트웨어 제품발표 사실 하나가 기업 의주가 오르내림세에 영향을 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컴퓨터산업이 만들어낸 신조어 "정보통신"의 의미는 30여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한 나라의 정책수립 과정에서부터 개인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정부 부처 가운데지난 94년 그 의미를 그대로 원용한 정보통신부가 탄생한 것은 이를 잘 반영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0년에 불과하지만 과거를 되돌아 보고 쌓여 있는 자료들을 정리해 보려 하는 것은 단지 이같은 격세지감의 흥미만을 돋우려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시간이 가면 잊혀져 버릴 것이 분명한 지나간 흔적들을 기록해 두고 싶고, 그래야 앞으로 누군가 이 사실을 토대로 우리의 컴퓨터 역사를 정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처음 도입된 컴퓨터는 1967년 경제기획원 통계국 에설치된 IBM의 "IBM 1401"로 기록돼 있다. 물론 이전부터 미8군 등 주한 미군영내에서는 미국방성에서 직접 공수된 각종 컴퓨터가 군수 및 작전용으로 더러 사용돼 오고 있긴 했다.

"IBM 1401"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컴퓨터 역사를 더듬어보면 그 어떤분야 못지않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초창기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는 미군 들로부터 컴퓨터사용법을 익힌 지 10년 만에 컴퓨터 국산화 의지를 불태웠는가 하면 중학교 무시험 추첨을 컴퓨터로 처리했다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일도 있었다. 또 은행의 금전 출납을 컴퓨터가 대신한다해서 장안이 흥분되는 등 적어도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컴퓨터의 역사는 "일이 터질 때마다 매번 새롭게 쓰여질 정도로 바쁘게 이어져 갔다.

그런가 하면 컴퓨터 도입 5년만에 일어난 "AID차관아파트 추첨부정사건"은 컴퓨터가 경제발전과 인류문명 발달에 반드시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만은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국내 최초의 컴퓨터범죄사건이었다. 이같은 사건 은 오늘날에는 신문의 가십란에도 등장하기 힘들 만큼 보잘것없고 유치한 것들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처음 도입돼 오늘에 이른 30년을 되돌아 보면 하루하루가 경이롭고 신기했던 나날이었다. 60년대 도입기를 지나 70년대 말부터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는 컴퓨터의 도입을 크게 늘리고 활용 을 극대화시키는 도약기를 맞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60~70년대 못지않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 특 히이때는 당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컴퓨터 이용이 어느 분야에까지 미칠 수있는가를 실험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이때는 90년대 이후 세계 컴퓨터 환경의 조류를 움켜쥔 PC가 청계천상가를중심으로 탄생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청계천 상가는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유치를 계기로 용산상가로 상권이 이원화될 때까지 한국의 실리콘밸리로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현주소를 대변하다시피했다.

청계천상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을 떠받친 하나의 축이었다면 반대편을 받치고 있던 또다른 축은 외관상 기업조직을 갖춘 컴퓨터전문회사들이었다.

이시기에한국과학기술원의 석학들과 한국IBM출신 등 젊은 수재들이 모여 각 각설립한 삼보컴퓨터와 큐닉스컴퓨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 컴퓨터전문 회사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 컴퓨터전문회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IBM.스페리(현 유니시스 전신).후지쯔.프라임 등 미국이나 일본회사들의 현지법인 또는 대리점들이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이같은 기업운동은 80년대 중반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 도약기를 대표하는 사건으로서 90년대의 강력한 산업적 토대를 갖추게되는 토양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이때는 또한 삼보컴퓨터나 큐닉스컴퓨터에 자극받아 금성사(현 LG전자).삼 성전자.대우전자 등 가전 3사가 일제히 컴퓨터사업에 신규 진출, 전문기업들 이청계천상가 군소기업들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는 등 산업적 위용을 갖추게 되는 시기다. 주요 사건을 보면 오늘날 국가기간망의 토대가 된 행정전 산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이 당시 정부(5공화국)의 강력한 힘에 의해 처음으로 기획됐고 88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체신부(현 정보통신부)의 교육컴퓨터 보급계획도 이때 입안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도약기를 거쳐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90년을 전후한5년여의 시기는 그동안 확장일로에 있던 컴퓨터 분야에 제동이 걸리게 되는방황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서 이 시기에 방황기를 맞게 된 것은 도약기에서얻어낸 자신감이 너무 팽배한데 따른 반작용이기도 했다. 가장 큰 시련으로 는5대 국가기간전산망이 각종 부조리로 전면 재검토될 위기에 처한 데다 한때세계에서 4번째 수출국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PC산업이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에서 가격경쟁에 밀려 퇴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또 자신만만하게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국민보급형PC개발프로젝트가 정부지원 미흡과 참여업체 의지박약으로 용두사미가 돼 전체 업계 이미지에 먹칠을 가하는 일도 이때 발생했다.

한편 이 시기에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은 정부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만큼 이른바 공공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러나 업계현실이 무시된 채 정부 의지대로 기획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실패한 결과가 더 많았다. 물론 성급한 평가이긴 하지만 주전산기 공동개발 프로젝트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거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보급형PC나 한국형 운용체계(OS)개발, 대형컴퓨터 국산화계획(오로라프로젝트)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은 대부분쓴맛만을 남긴 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곤 했다.

이 시기에는 또 각종 무역자유화가 이루어지고 외국업체들의 직접 진출이 가속화됐고 국내시장에서 국산과 외산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사례가 빈번하게나타났다. 그 결과 그동안의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경쟁력이라는 것이 사상 루각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기술고도화와 유망분야에 대한 집중투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시기에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몇가지 사건은 있었다. 바로 86 년아시안게임을 경험으로 독자 추진됐던 88서울올림픽 전산화시스템의 개발 과이의 성공적 운영이었다. 당시 전세계는 서울올림픽에 이르러 규모가 커질 대로 커진 올림픽경기 운영을 어떻게 치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지만당시 시스템공학센터(SERI)가 주축이 돼 개발된 경기정보시스템 "자이온스(G IONS)"는 이같은 우려를 깨끗이 씻어냈다.

방황기를 거쳐 정착기. 비로소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에 정착기가 시작됐다.

이시대의 특징은 PC와 워크스테이션 등 소형컴퓨터가 이미 컴퓨팅 환경의 중심적 위치에 올라서게 됐고 이를 토대로 다운사이징 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는 점이다. 기업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PC는 일반 가정에서 흔히 볼수 있는 가전제품이 돼 버렸다. 또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등장도 중요한 이슈가 됐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소프트웨어에 대한 사용자들의 재인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각 시대구분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도입 기(1960~1970) △적응기(1971~1978) △도약기(1979~1986) △방황기(1987~199 2) △정착기(1993~ )

작성일자 : 1995.12.11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2) 도입기 (1) 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size:5t5u836i]
컴퓨터에 눈뜨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컴퓨터는 1967년4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통계를 위해 도입했던 IBM의 "IBM 1401"이다. 그런데왜 공식적 이라는 단서가 붙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여러가지 사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이 과정에서 "공식적"기록을 갖고 있는 "IBM 1401"이나 또는 "비공식적 "기록을 남기고 있는 후지쯔의 "파콤222(FACOM 222)"기종 그 자체가 중요한것은 아니다. 또 불과 1~2개월차이 밖에 나지 않은 도입시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의미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1951년에 첫 상용 컴퓨터("유니백 I")가 출현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15년 이상이 뒤진 6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컴퓨터에 눈을 뜨기 시작한것이다. "IBM 1401"과 "파콤222"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바로 잠자던 우리의눈과 귀와 머리를 깨워주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어느 컴퓨터가 첫번째 도입된 기종이냐는 시비는 이같은 사실적 기록을 전제로 했을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선 1967년 4월에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도입된 "IBM 1401"이 어떤 컴퓨터였던가를 살펴보자. 또 이 컴퓨터의 도입이 당시 우리나라 상황에서 어 떤의미를 던져주었던가를 알아보자. "IBM 1401"에 대해 당시 한 일간지는 "I BM전자계산기 등장 - 경기원에서 처음 시동, 1초 동안에 6만자나 읽어 라는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설치된 IBM전자계산기가 24일 낮 12시30분부터 시동되었다. 이 계산기는 시가 40만달러에 해당하는 것으로 통계국은 IBM회사에 대해 매달 9천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빌린 이 전자 계산기의 성능은 예를 들어, 지난 66년의 인구조사 결과를 완전히 분석하자 면 통계국직원 4백50명과 2억1천만원의 돈, 그리고 14년 반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 기계를 쓰면 9천만원의 돈과 시간은 1년 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동 아일보" 1967.6.24) 이같은 내용의 기사는 당시 도하 일간지에 모두 실렸는데 통계국은 67년 4월에 이 컴퓨터를 도입, 3개여월에 걸친 설치작업 끝에 이날(6월24일) 박정 희대통령, 장기영부총리, 김기형과학기술처장관, 김학열경제기획원차관 등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IBM 1401"의 가동식을 가졌던 것이다.

"IBM 1401"이 도입되기 전까지 통계국은 천공카드시스템(PCS)으로 각종 통계업무를 처리해 오던 터였다. 통계자료에 대해 단지 계산시간을 단축할 수있었을뿐 수동으로 집계하는 기계와 다름없었던 이 PCS는 66년에 실시됐던간이 인구센서스를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때마침 미국출장중 연방정부와 산업현장 등에서 컴퓨터가 유익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본 김학 열차관이 통계국에 컴퓨터 도입을 과감하게 지시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는지금과 달리 우리나라 전체인구중 컴퓨터를 구경해본 사람을 손에 꼽았을 정도로 컴퓨터에 무지했던 데다 기술정보의 부재로 어떤 기종을 택해야 할지막막한 상황이었다.

IBM사가 발표한 지 8년이 지난 "IBM 1401"을 통계국이 선택하게 된 것은매우 흥미있다. 당초 김차관 등이 도입하기로 결정했던 신형 "IBM시스템/370 (S/370)"가 계약 후 실제 도입까지 1년반이 걸렸을 만큼 주문이 쇄도했던 인기 기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후사정에 대해 한 컴퓨터회사의 사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획원에서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얘기가 흘러나가자 몇몇 외국기업들이 자사기종 도입을 권유키 위해 기획원 방문이 잇따랐다. 선뜻 기종을 결정하지못하고 있을 때 마침 "타임"지의 S/370 기사를 본 김학렬차관이…(중략) 이기종을 도입키로 하고 IBM측과 기종도입을 협의했다. 그런데 기획원 관계자들과 협의하던 IBM영업대표는 S/370의 주문이 밀려 도입까지 1년 반이 걸리므로 잠정적으로 "IBM 1401"을 도입토록 권유했고 기획원 관계자들이 이 권유를 받아들였다."("한국아이비엠25년발자취") 이때 도입된 "IBM 1401"은 1959년에 개발됐던 것으로서 트랜지스터를 주기 억장치로 사용하던 2세대 컴퓨터였다. 1964년 IBM이 집적회로(IC)를 이용한3세대 컴퓨터 S/360을 발표할 때까지 세계적으로 6만대가 판매됐을 만큼 인기를 누렸다.

2세대 마지막 주자였던 "IBM 1401"은 모든 주기억장치 용량이 16KC(Kilo Character Kilo Byte)에 불과, 성능면에서 XT급 PC에도 못미쳤지만 크기는 캐비닛만한 본체와 여러대의 보조기억장치.인쇄장치.항온항습기.하네스 등 부대장비가 따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통계국은 "IBM 1401"을 월 평균 4백~5백시간씩 사용하면서 간이 인구센서 스자료를 처리하다 가동 1년반 만인 1968년12월 당초 예정했던 S/370(모델4 0)를 도입하게 된다.

"IBM1401"은 그러나 이처럼 우리나라에 첫 도입된 컴퓨터로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도입시점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엄연한 2세대 컴퓨터였지만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IBM 1401"을 도입한 주 목적은 앞서 지적했던 대로 기존에 도입해 쓰고 있던 PCS의 계산속도 향상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나 관련자료들을 엮어 정황을 들여다 보면 김학렬차 관을 비롯한 기획원 관계자들의 "IBM 1401"에 대한 인식은 이 기종이 기존에사용해 오던 PCS보다 단지 한 단계 위의 기계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따라서 IBM 1401"의 이용시한도 S/370이 도입될 때까지만이라는 "잠정적"시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기획원 관계자들의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시대착오적이었다 하더라도 PCS는 우리나라의 컴퓨터 도입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1961년 3월 통계국이 도입했던 IBM사의 PCS를 우리나라에 도입 된 최초의 컴퓨터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1967년 당시 통계국 키펀치실 책임자였던 이춘희씨(현 KIST소프트웨 어공학연구부)는 한 회고문에서 "그당시 나는 최초의 컴퓨터시스템(PCS, IBM 1401)을 이용하여 인구센서스 통계처리를 하던…(중략)"(성기수박사 회갑기념집 1993)이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IBM 1401"의 "공식적"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기종은 PCS 외에 앞서 언급한 파콤222 가 있다. 1967년 5월 생산성본부에 도입된 "파콤222"는 1961년 일본 후지쯔(부사통)신기제작주식회사가 개발한 것으로서 "IBM 1401"처럼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는 2세대 컴퓨터에 해당된다.

"파콤222"의 성능은 기억용량이 18KC(1만8천어), 처리속도가 초당 1백만자 로역시 XT급 PC에 미치지 못했지만 "IBM 1401"보다는 우수했다. 가격도 6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한 신문은 "파콤222"를 "비교.판단.통제에 무한정"이 라고 쓰고 있고 이 기종이 설치된 생산성본부의 전자계산소 내부 사진을 함께게재하면서 "20만어(오기인듯)의 기억장치 등 거의 만능에 가까운 전자계 산기를 설치한 전경"이라며 경외감을 표시하고 있다.("서울경제신문" 1967. 6.20) "파콤222"의 외형은 "IBM 1401"을 훨씬 능가했는데 당시 한 잡지는 "총 하중35톤으로 모두 5대의 트럭에 분승돼 인천에서 서울 회현동까지 운송되면서 경찰 오토바이의 호위를 받았다. 운송에만 2백여명이 투입됐고 설치작업에 25톤 기중기가 철야 동원됐다"고 적고 있다.("기업경영" 1967.9)한국에 상륙 된 시점으로만 본다면 "파콤222"는 일본으로부터 인천항 도착일이 1967년 3월25일로서 1967년 4월15일인 "IBM 1401"보다 기록상으로 빠르다. 또 각각 운용장소에 설치돼 첫 가동에 들어간 날짜도 1967년 6월13일께의"파콤222"가 같은해 6월24일의 "IBM 1401"보다 10여일 빠르다. 그 뿐만 아니라 "파콤222" 를 도입한 생산성본부는 과기처의 기술요원 양성 계획에 따라 같은해 7월10 일 "제1회 전자계산조직 프로그래밍 기초강좌"를 개설하는 등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요원 양성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BM 1401"이 "공식적"으로 국내에 첫 도입된 컴퓨터로 남게 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이다. 당시 재무부장관 소관이던 수입 컴퓨터에 대한 통관허가가 "IBM 1401"은 1967년 4월25일, "파콤222"에게는 그보다 17일 뒤인 5월12일에 각각 내려졌다는 것 때문이다.

작성일자 : 1995.12.19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3) 도입기 (2)[/size:5t5u836i]
196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도입된 해이다. 우연이었을까. 이해에 기록된 또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전자계산소의 효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자계산실이 이 해9월14일 발족된 것이다.

KIST전자계산실은 KIST전산개발센터(7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시스템공학센터(84년), KIST시스템공학연구소(SERI.89년) 등으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이르면서 컴퓨터이용기술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던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 거대한 획을 긋고 있다.

사회 전반의 예산업무 전산처리, 전화요금 전산화, 대학예비고사 전산처리, 경영정보시스템(MIS) 모델연구 등 우리나라가 초창기 컴퓨터 영향권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모든 시스템 개발을 KIST전산실이 해냈던 것이다. 또 80년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양대회 전산시스템의 개발과 성공적 운영을 통해 전산화 기반조성 및 정보화 마인드 확산에 결정적인 업적을 남기고있다.

지난 93년 12월11일 서울 한 호텔에서는 한 로과학자의 회갑기념집 증정행사가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이날 증정된 회갑기념집은 교수.기업체대표등 현재 학계와 정보산업계, 관계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인 제자격의 60여명이공동 제작한 것으로 30여년 동안 로과학자가 국내 컴퓨터 역사에 남긴 업적을 80여편의 글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증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특유의 상고머리에 동안인 로과학자의 얼굴에는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에는 문득 30여년 전 KIST전자계산실창설에서 오늘날의 SERI가 있기까지의 갖은 풍상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이 노과학자가 바로 기계공학박사 성기수(현 동명정보대학교 총장)다. KIST전산실에에서 SERI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역사는 성기수의 반평생이기도하다.

1967년 KIST전산실의 창설작업은 당시 34세의 공군사관학교 항공역학교관(대위)이었던 성기수가 실장으로 스카우트되면서 완료된다. 이때 성기수는하버드대 역사상 최초로 2년만에 학위를 획득, 국내외 언론이 극찬하던 이른바 잘 나가던 젊은 과학자였다. 그가 영입됨으로써 KIST전산실 창설작업이완료됐다는 표현은 상당히 의미있는 대목이다. 그의 영입 자체가 결과적으로KIST전산실의 무한한 미래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KIST전산실 창설은 그가 혼자서 이루어낸 것이다. KIST의 성기수 영입과 초기활동 상황을 통해 KIST전산실 창설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KIST영입은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정열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당시 KIST소장이던 최형섭(작고)은 컴퓨터에 대한 전문지식이외에첫째, 수학적인 두뇌를 가졌고 둘째,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실천적 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 상태에서 김정열로부터 공군대위 성기수를 추천받았다.

최형섭이 이같은 조건을 내건 것은 정부 차원에서 KIST전산실에 거는 기대가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는 일제의 수탈에 이어 한국전쟁이 남겨준 민족의 가난을 면할 수 있는 최상의 처방으로서 경제건설을 겨냥한 과학기술의발전을 꼽았고 이를 계기로 66년2월 미국의 협조 아래 KIST를 발족시킨다.
이어서 컴퓨터 활용기술에 대한 연구가 KIST 핵심 연구분야 가운데 하나로부각되면서 전산실 창설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최형섭은 이같은 중대성때문에 초대 전산실 책임자 영입 문제에 무척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기수 자신도 초대 KIST전산실장 자리가 온 국민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곳이라는 사실을 직감, 서강대와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교수직 등을 포기하는 것으로써 최박사의 배려에 답하게 된다.

67년12월 전산실장에 정식 취임한 성기수는 KIST전산실의 진로를 정하기위해 곧바로 미바텔연구소에서 파견된 전문가들과 함께 컴퓨터관련 수요조사와컴퓨터기종 선정작업를 벌이게 된다.

바텔연구소는 컴퓨터기종 선정을 위한 벤치마크 테스트와 KIST운영의 전반에대한 것을 결정하는 KIST 자문기관이자 KIST 설립의 모델 연구기관이기도했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토론이 있게 되는데 바텔측이 KIST의 컴퓨터활용분야를 과학기술로 제한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성기수는 사회 모든 분야를 활용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팽팽하게맞섰고 결국은 바텔측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KIST 출신들은 이를 두고 오늘날 우리나라 정보산업의 방향이 복잡한 변수들로 구성된 수학적 모델로 자리잡히게되는 분기점이 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KIST전산실은 마침내 69년9월 미컨트롤데이터사(CDC)로부터 숙원이었던 "CDC-3300"초대형 컴퓨터를 월 1만6천8백50달러씩의 임대료를 지불키로 하고첫컴퓨터로 도입하게 된다. 이때 우리나라 대졸 초임은 3만원(당시 환율로 81달러)이었다.

"CDC-3300"를 도입한 KIST전산실은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상 공식적으로 11번째의 컴퓨터 도입기관(기업)으로 기록되고 있다. "CDC-3300"는 당시로선가장 강력한 성능을 갖는 기계로 평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성기수는 이컴퓨터가 도입되던 당시 거의 매일 TV와 라디오방송에 불려다녔으며 1969년말처음으로 대학예비고사의 채점을 광학카드판독기(OMR)식으로 처리해 냄으로써 이 컴퓨터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때 "CDC-3300"는 고작 32KW(Kilo Word)의 기본메모리와 중앙처리장치(CPU)연산속도도 1플롭스(FLOPS)에 불과한 데다 KIST전산실 요원들조차이 기계를 믿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학예비고사 채점을 담당했던최덕규(고등기술연구원)는 시험지 답안 처리 오류를 막기 위해 여대생 3백명을 3일 동안 강당에 연금한 채 다른 곳에 답안을 옮겨 쓰는(이기)작업을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차검증을 위해 상고생이 주판으로합산을 하고 체크된 에러를 확인하느라 산더미 같은 시험지를 뒤지곤 했다고회고하고 있다.

이로부터 20여년 뒤의 일이지만 KIST전산실은 88년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슈퍼컴퓨터 "크레이2 S"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 기종의 성능은 기본메모리가 1백28MW, CPU연산속도는 무려 20억 플롭스나 됐다. 도입한 컴퓨터의 CPU연산속도로만 본다면 KIST 전산실의 컴퓨팅파워나 영향력은 20년만에 무려20억배로 확대되는 장족의 발전을 꾀하게된 셈이다.

다시 KIST전산실이 창설되던 초창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68년부터 성기수와함께 81년까지 이곳에서 재직한 안문석(현 고려대 교수)은 KIST전산실의초창기를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제1기:YMCA시기(1967~1968)

이때는 KIST전산실이 창설되던 당시로서 현재의 홍릉단지로 입주하기 전종로5가의 YMCA빌딩 5층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던 시기이다. 당시 공사 교관, 한국경제개발협회 조사역, 서울대 경영대학원 및 행정대학원 등에 출강하던 성기수는 바텔연구소와 공동연구를 수행, KIST전산실 설치 타당성 보고서를 작성한다.

성기수가 이때 잠시 적을 뒀던 한국경제개발협회는 자유당 시절 부흥부장관을 지낸 송인상이 경영하던 일종의 경제조사연구소였다. 이곳에서 성기수는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계량부문을 담당했으며 이때 이명재(현 부산대교수). 이승윤(작고. 전아시아개발은행이사). 안문석 등 KIST전산실 초기 3인방을 만난다.

"CDC-3300"가 도입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정식 컴퓨터는 없었지만 "IBM 029"(카드천공기)와 "IBM 059"(카드검공기) 등 카드천공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제2기:컴퓨터 설치 및 요원선발 시기(1968~1970)

YMCA빌딩에서 현 홍릉단지로 이사를 했으며 본격적인 전산실 요원을 선발하던 시기이다. 이때 최덕규.김길수(전 삼도데이타시스템 사장).한윤경(현경원대교수) 등이 2기 멤머로 KIST전산실에 가세했다.

이때 컨트롤데이터사(CDC)로부터 "CDC-3300"가 도입돼 설치됐고 KIST전산실요원들은 한국전력에 재직중인 송길영(현 고려대교수)로부터 포트란 프로그래밍을,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의 이덕순(전 삼보소프트웨어 사장)으로부터는 운용체계를 각각 배웠다.

당시 바텔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를 토대로 컴퓨터 기종이 "CDC-3300"로결정되면서 이의 도입을 놓고 성기수실장과 청와대 과학담당비서관 정운수와갈등이 표면화됐던 일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되는 얘기다. 이때 정운수는 다른 기종을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도입 예산규모가하루 아침에 임차 수준으로 바뀌게 됐다는 것이다.

*제3기:교육반 설치 및 OJT도입 시기(1970~1971)

컴퓨터를 갓 설치한 KIST전산실의 운영방침은 "컴퓨터가 어렵다는 사고를깨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어셈블리 프로그래밍 교육반수강생을 공모했고 수료자 가운데 유능한 이를 교육반 강사로 충원하기도 했다. 혹은 전산실내 프로그램 개발보조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OJT(Onthe Job Training)제도로서 초창기 전산실요원 가운데는 여기서 특채된 출신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이가 김봉일(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이었다.

초창기부터 KIST전산실의 교육반과 OJT를 거쳐 나간 사람들은 현재까지 1만여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KIST전산실 재직경험자를 포함, 현직에 있는대학교수만 50여명이며 연구원재직중 신기술 개발을 통해 창업한 회사가 15개나 되고 있다. 한 조사통계에 따르면 KIST전자계산실에서 배출한 인력이한때 연구원, 기업 중견간부 및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인력 등 우리나라 전체컴퓨터 고급인력의 11%에 이른 적도 있었다.

KIST전산실의 교육사업은 지금도 시스템공학연구소 강남분소에서 이어지고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0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4) 도입기 (3)[/size:5t5u836i]
우리나라에 역사상 처음으로 진출한 외국 컴퓨터회사는 IBM이다. 첫 발을디딘 컴퓨터회사가 IBM이었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그다지 놀라운 것은 못된다. 60년대이후 80년대말까지 세계 컴퓨터 역사는 바로 IBM의 사사라고 해도과언이 아니었을만큼 시장지배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IBM은 64년 3세대 컴퓨터기종의 선두주자 "시스템 360" 발표를 계기로 세계컴퓨터업계 왕좌를 거머쥔다. 80년대말까지 IBM은 세계시장에서 50% 이상의점유율을 기록, 확실한 1당체제를 구축했으며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IBM이 한국에 진출한 1967년은 IBM에게는 "시스템 360"시리즈가 없어서 못팔던 시기였다. IBM의 한국진출 계기는 바로 이같은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않다.

67년 4월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컴퓨터가 "IBM 1401"이라는 사실은 앞서밝힌 바 있다. 당시 IBM은 두가지 조건을 붙여 발표된 지 8년이나 지난 구형2세대 컴퓨터 "IBM 1401"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공급했다. 그 조건의하나는 "IBM 1401"을 통계국이 당초 도입키로 했던 "시스템 360"이 인도될때까지만 잠정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고, 또하나는 도입 즉시 컴퓨터 활용에 수반되는 인력교육과 지속적 애프터서비스를 위해 IBM한국법인을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두번째 조건에 따라 IBM은 67년 4월25일 서울에 자회사 "주식회사 아이.비.엠.코리아", 영문으로 "IBM KOREA, Inc."를 출범시키게 된다. 사실 IBM은이보다 앞서 한국진출을 계획하고 현지법인 설립에 대한 시장조사 및 타당성조사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

IBM은 63년 미국 본사에 근무하던 한국인 이주용(현 한국전자계산회장)에게한국지사장 직함을 주고 한국에 파견, 시장조사를 겸한 영업활동을 수행케한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한국은 IBM의 영업망 확장대상 국가가 되지 못했다. 이주용의 회고에 의하면 3공화국 초기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백달러에도 못 미쳤고 국민총생산(GNP)은 IBM의 연간매출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월간 "경영과 컴퓨터" 1987.2)

컴퓨터를 도입하겠다는 기관이나 기업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IBM은 홍콩이나 일본주재 영업대표들을 파견, 한국진출을 타진했으나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참고로 IBM의 자회사가 설립된 아시아 태평양지역 국가를 살펴보면 호주(32년).일본(37년).필리핀.인도네시아(이상 38년).태국.버마.인도(이상 52년). 싱가포르(53년).뉴질랜드.말레이시아(이상 55년).대만(56년).홍콩(57년). 스리랑카(62년) 등이다.

IBM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정부로부터 현지법인 설립을 요청받았던것이다. IBM으로서는 경제기획원의 "IBM 1401" 도입을 계기로 여러 기관에서컴퓨터 도입에 관심을 보인데다 마침 한국정부가 외자도입을 위해 외국기업의 투자유치를 적극 권장하고 있던 터여서 현지법인 설립을 마다할 이유가없었다.

이에 따라 IBM은 미국외 해외지역을 관장하던 IBM월드트레이드코퍼레이션을통해 67년1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투자인가 및 기술도입계약 인가신청서를제출하고 같은해 3월 외자도입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치게 된다. 출범 자본금은 95만2천 달러(4천7백25만원)였고 18개월 뒤에 1백40만 달러(7천20만원)를 추가 출자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주식회사 아이.비.엠.코리아"(약칭 한국IBM)출범에 앞서 IBM은 50년대 말부터 주한 미8군 영내에 한국인 직원을 상주시켜 시스템 교육 및 유지보수를담당해오고 있었다. 60년대 중반까지 미8군은 한국정부도 갖지 못한 컴퓨터를 대구컴퓨터센터에 2대(IBM 7010와 IBM 1460), 부평보급창에 1대(IBM 1460), 용산사령부에 1대(IBM 1130) 등 4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IBM이 서울에 연락사무실 겸 영업사무실 역할을 하는 비법인 형태의지사를 두게 된 것은 60년 초반이었다. 경제기획원이 1961년3월 국세조사 간이센서스와 농업센서스 처리 등을 위해 IBM으로부터 1백30대의 천공카드시스템(PCS)을 AID차관으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IBM한국지사는 바로 미본사의 지시를 받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직원들을일본IBM에 파견, PCS 위탁교육을 비롯한 유지보수를 담당하게 된다. 또 미8군의 컴퓨터 유지보수와 간헐적이긴 하지만 PCS를 납품하는 등 영업활동도수행했다. 한국지사에 근무하는 요원들은 IBM이 직접 채용한 사람들이었다.

이 당시 조사통계국 직원으로서 IBM한국지사에 의해 일본에서 PCS교육을받고 훗날 우리나라 정보산업 개척자로 변신하게 된 이들이 이지상(현 한국소프트웨어써비스 대표).한필봉(대한통계협회 전문위원).김동희(전 동양시스템산업 대표) 등이다.

한국IBM은 67년 4월25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8백40호에서 정식 출범했다. 초대 사장은 미본사 직원으로서 한국IBM 설립과정에 직접 관여했던루이스 B스탠트였다. 창설 멤버로는 스탠트사장 외에 미8군 프로그래머 출신의이정희(여.90년 정년퇴임).김영수(70년 퇴임.미이민) 등과 미8군 PCS기술요원 손용호(한국IBM영업관리본부장 역임.90년 사직)를 비롯 오영전(재직중).

윤영훈(77년 사직).정우진(87년 사직) 등 IBM한국지사 소속 요원 6~7명이었다. 출범 사무실이 된 반도호텔 8백40호는 15평 남짓한 크기에 사무용 책상2개와 손님접대용 소파 하나가 고작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아이비엠 25년 발자취")

한국IBM은 이후 같은해 6월 사무실을 서소문 삼령빌딩으로 옮기고 조완해(87년 사직.현 한국유니시스 사장).김성중(91년 사직.기흥정보시스템대표)등신입사원을 뽑아 창업 첫해 직원을 24명으로 늘렸다. 71년까지 한국IBM의직원은 현사장 오창규(68년 입사).전무 서치영.김형회(이상 69년 입사) 등이입사, 87명으로 증원됐으며 영업실적에서 독보적인 시장점유율 기록하게 된다.

우리나라 정부공식문서기록을 보면 67년 4월 "IBM 1401"의 도입을 시발로71년말까지 5년 동안 경제기획원과 락희그룹(현 LG그룹) 등 35개 기관 및 기업들이 36대의 컴퓨터를 도입한 것으로 돼 있다. 그 내역을 보면 IBM 13대, 스페리랜드(유니백) 8대, 후지쯔(화콤) 5대, CDC(CDC 및 사이버) 4대, NCR 3대, 버로우스 2대, 디지탈(PDP) 1대 순이다.

한편 한국IBM이 출범한 직후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외국기업 투자유치 방침에 따라 70년대 초까지 미컨트롤데이터(CDC).미플랜클럽("유니백"컴퓨터판매회사).미스페리랜드(현 유니시스로 합병) 등 컴퓨터 회사들이 직접 또는합작 형태로 한국에 법인을 설립했다. 또 일본후지쯔.미NCR(현 AT&T GIS).

미버로우스(현 유니시스로 합병) 등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들이 대리점 형태로 한국에 진출한다.

이 가운데 CDC는 IBM에 이어 두번째로 67년 9월 5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를 설립했다. CDK의 출범 목적은 컴퓨터 판매보다는전자공업진흥법과 외자도입법을 배경으로 하는 반도체공장 건설이었다. 당시CDK처럼 반도체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진출한 회사들을 보면 페어차일드(66년5월).시그네틱스(66년 8월).모토롤러(67년4월)등이 있다.

CDK는 초기에 반도체 조립에 전념하다 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전자계산실에 대형기종 "CDC 3300"의 공급을 계기로 컴퓨터 판매에 본격 나섰다.
CDK의 초기 멤버는 CDC소속의 민병래(사장),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의 이규설(현 한국전자사무기 대표)과 이지상, 미8군 소속의 이덕순(전 삼보소프트웨어사 장.현 한국OEC 대표) 등이었다.

68년 10월 미플랜클럽사와 동양물산이 8대2 비율로 투자, 설립된 한국유니백은 당시 IBM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를 달리던 스페리랜드(SPERY Land)의 "유니백(Univac)"시리즈를 국내에 직공급했다. 한국유니백 역시 IBM처럼 보건사회부 국립보건연구원에 "유니백1005" 공급을 계기로 출범했다. 창설 멤버는나중에 스페리랜드코리아의 사장을 지낸 해리화성김을 비롯 경제기획원 소속한용석과 이달호, 생산성본부의 육종국 등이었다.

한국유니백은 71년 3월 스페리랜드(나중에 스페리로 개칭)가 2백만 달러를출자해서 설립한 스페리랜드코리아(나중에 스페리주식회사로 개칭)에 직원대다수를 인계하고 판매전문회사에 탈바꿈했다.

IBM보다 더 긴 기업역사를 가지고 있는 NCR의 한국진출은 67년1월 동아무역과 대리점계약을 통해서였다. 동아무역은 이후 75년 11월 NCR의 국내 판매및 지원을 위해 동아컴퓨터를 출범시킨다.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에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도입기는 이처럼 거인 IBM의 상륙을 필두로 기라성 같은 미국회사들의 진출 러시를통해 컴퓨터 활용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어간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1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5) 도입기 (4) 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size:5t5u836i]
60년대 주요 기관들이 외국에서 컴퓨터 도입을 서두르고 있을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컴퓨터를 개발하자는 노력이 심심치 않게 시도됐다. 이런 노력은 락희그룹(현 LG그룹)이 사상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생산, 우리나라 전자공업을 일으킨 59년이후 불붙기 시작해 60년대말까지계속됐다. 그런 가운데 60년대초 한양공대 전자공학과 대학원교수로 재직중이던 이만영(현 한양대 명예교수)은 컴퓨터 국산화를 몸으로 실천했던 대표적인 과학자였다. 당시 30대초반이던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믿기 힘든컴퓨터를 처음으로 직접 개발해낸 사람이었다.

이만영이 제작한 최초의 국산 컴퓨터에 대한 내용은 당시 한 신문에 "한국최초의 전자계산기 완성"이라는 제하의 머릿기사로 보도되고 있다. <"한양대학보"(현 한대신문) 64. 5.15>

이 신문에 따르면 이만영이 개발한 "전자관식 아날로그계산기"는 모두 3종으로서 소형인 제1호기(62년 8월)와 대형인 제2호기(63년3월)에 이어 이를개량한 제3호기(64년5월) 등이었으며 보도 내용은 3호기에 관한 것이었다. 3호기에 대해 신문보도는 정보처리보다는 공정제어나 물리량 계측 등에 사용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서 "연립대수식, 고계의 선형 및 비선형 미분 방정식, 편미분 방정식의 해답을 자동으로 계산할 수 있어 어떤 물체의 움직이는 진동상태를 재는 것으로부터 자동제어계, 항공역학계, 통신계, 음향계 등 다방면에 걸쳐 그 활용이 기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콜로라도대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고 60년 귀국했던 이만영이 한양대 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중 이 컴퓨터를 제작, 완성하기까지는 온갖 어려움이있었다. 그는 당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 계산기의 완성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컴퓨터를 제작하는 동안 가장 큰 애로사항은 각종 부속품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부속품을 구하기 위해 고물상들을 모조리뒤져야만 했다. …<중략> 이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제작에 착수했던 것은 나의전공인 제어공학 부문을 활용해보고 대학원생 강의에서 실습하기 위해서였다."<"전업건설신문" 64. 6. 1>

이만영의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는 그러나 연구용이나 강의 실습기자재외의 상업용도로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뒤이어 불어닥친 IBM.스페리 등상업용 디지털컴퓨터 바람에 밀려 그의 컴퓨터는 한양대학교 박물관행 신세를 지고 말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이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항공기라든가레이더, 유도탄 등 정밀계산이 요구되는 무기체제를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꿔말해 이같은 무기들을 생산하지 못했던 까닭에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만영의 컴퓨터가 빛을 발휘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부차원에서이같은 노력을 평가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컴퓨터는 커녕 과학기술전반에 관한 정부차원의 정책이나 계획은 전무한 상태였다. 산업 연관효과를 따져 과학기술발전을 진흥시킬 수 있는 정책 시스템이 있었다면 이만영과 같은 젊고 유능한 과학자들을절망케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지적이다.(그는 이후 미버지니아주립대교수로한국을 떠난다)

그러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62~66년)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정부는 이만영과 같은 젊은 학자들의 과학기술 개발의지를 북돋우게하는 한편, 경제부흥의 요체로서 과학기술정책을 정부차원에서 추진해야된다는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경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정부가 발표한 첫 과학기술정책은 66년 경제기획원이 마련한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었다. 정부는 또 같은 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과학기술연구원)의 창설과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의 결성 등을 유도하면서과학기술발전과 진흥에 대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입안하고 시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또 국립과학관 마련을 위한 한미협의회와 같은 단체들을 잇따라 출범시켰다. 사실 과학기술진흥을 통한 경제개발계획 개념이 처음으로 적용된것도 이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때 마련된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이듬해 67년 1월 법률 제1864호로제정된 과학기술진흥법의 모태가 됐다. 특히 이 진흥법 10조2항에는 과학기술처장관이 수립해야할 시책과 계획 가운데 "전자계산기조직(컴퓨터)의 도입과 이용기술의 개발 및 정보처리요원의 양성에 관한 사항"등을 규정해 놓고있음을 볼 수 있다. 정부차원으로서는 최초로 컴퓨터에 대한 정책의지를 표명해 놓은 대목이라 할 수 있다.

66년에서 67년사이 경제기획원이 주도했던 일련의 과학기술정책 의지 표명은사실 "한송이 국화 꽃"에 비유되고 있는 과학기술처의 발족을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65년 5월 박정희대통령의 미국방문시 존슨대통령과 한미양국 정부의 지원아래 KIST를 설립키로 합의할때부터 과학기술처의 발족을 계획해왔었다.

과학기술처는 마침내 67년 4월21일 김기형(작고)을 초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정식 발족 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을 정부차원에시 독자적으로 입안하고 시행하기 위한 최초의 정부조직이었다. 과학기술처는 특히 과학기술진흥법을 토대로 컴퓨터의 도입과 개발을 본격 추진해 나감으로써 오늘날 컴퓨터가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과학기술처 발족후 1개월후인 67년 5월23일 김기형장관은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역사적인 "전자계산기 사용 개발 7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골자는 컴퓨터요원양성과 훈련, 소프트웨어의 수출, 컴퓨터에 대한 국민계몽, 컴퓨터의 활용시기, 법적지원, 이를 추진할 위원회의 설치 등이었다. 김장관은 이미 세계 곳곳에 이미 5만여대(당시)의 컴퓨터가 보급돼 사용되는 상황에 비추어 우리나라에서도 하루 빨리 컴퓨터의 도입과 개발을 촉진시키고자이들 세부방침을 토대로 7개년 계획을 마련했던 것이다.

당시 기관이나 기업의 경우 컴퓨터 도입은 그 자금소요가 차관일 경우 과학기술처장관의 검토가 따랐다. 또 정부보유외환(KFX)자금으로 도입할 경우는주무부처 장관의 추천승인이 있어야만 허용되었다.

이를테면 컴퓨터도입 승인업무를 일관되게 처리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없었던 셈이었다. 또 국가적 차원에서 도입의 경제성 여부가 규명되지 않았거나구체적 운용계획이 마련되지 않은채 컴퓨터를 들여 놓을 경우 막대한 외화낭비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뿐만아니라 기관별 또는 기업별로 무분별하게 컴퓨터를 도입할 경우 컴퓨터요원 및 적용 업무량 부족에 따른 가동률의 저하가 우려되기도 했다. 컴퓨터가동률의 저하는 도입기관끼리 외부 용역수탁경쟁을 유발시킬 가능성을 안고있었으며 이렇게 되면 당시 정부가 육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용역전문회사들의 위축을 초래할 것이었다. 용역전문회사는 곧 소프트웨어 수출의 첨병이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컴퓨터도입을 통제하고 소프트웨어용역 등 컴퓨터개발을적극 육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처는 "전자계산기 사용 개발 7개년 계획"에 따라67년9월 27일 전자계산조직(컴퓨터)개발 조정위원회를 설치, 공포했다.

이 위원회는 과기처차관을 위원장으로 각계에서 추천한 16명의 위원으로구성됐다. 국가정책과 기업분야의 경영개선 및 업무과학화와 생산성향상을위한 컴퓨터의 종합 개발 활용계획 수립.사전 도입검토.개발비의 조성과 배분.시설.교육훈련 및 보급 등 전반에 걸쳐 행정적 지원 및 통제가 주요 업무였다. 국책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컴퓨터산업육성 계획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컴퓨터의 도입검토나 개발 등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른실무조정은 초기에는 과학기술처 진흥국이 맡았다. 그러나 컴퓨터관련 정책업무가 점차 확대되면서 과학기술처는 71년 컴퓨터산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조직으로 정보관리실을 설치하고 컴퓨터도입 승인업무 등을 주관하게 했다. 정보관리실은 75년 정보산업국으로 확대 개편된다.

과학기술처가 발족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은 대망의 70년대를 향한 웅지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초창기 우리나라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던 과학기술처의 최대당면과제는 컴퓨터를 이해하고 이를 업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기회의 확대였다. 60년대말까지 과학기술처가 가장 우선적인 교육대상으로삼은 곳은 정부 각 기관 공무원들이었다. 공무원들이 먼저 컴퓨터를 이해하고사용할 줄 알아야 기관 및 기업의 컴퓨터도입 및 활용이 활성화된다는 당시의 시대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과학기술처는 이에 따라 발족 이듬해인 68년 4월부터 각급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기초과정, 고급과정, 특수과정 등으로 구성된 4주간의 EDPS요원 관리자과정 교육에 나섰다. 당시 재단법인 형태의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가 맡아 실시한 이 관리자과정 위탁교육은 5월 13일 1차로 33명의수료생들을 배출하였고 71년 과학기술처 산하 중앙전자계산소(현 총무처정부전자계산소)로 그 교육이 이관되기까지 1백65명의 초창기 EDPS관리자요원을 양성해냈다.

주요 교육내용은 EDPS(전자식 데이터처리 시스템)의 개념, 프로그래밍의기본원리 및 실습, 포트란의 개념 등이었다. 관리자과정 교육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자 곧이어 16주 단위의 전문과정이 개설됐고 이는 공무원들 사이에어셈블러, 코볼, 포트란 등 본격적인 프로그래밍 교육선풍이 이는 계기가 됐다. 이때 한국전자계산소에서 공무원 위탁교육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이주용(현한국전자계산 회장), 송길영(현 고려대교수), 황칠봉(현 효성데이타시스템 사장), 이성길(현 협진정보통신 대표), 정명진(전CDK 상무) 등이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2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6) 적응기 (1) 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size:5t5u836i]
외국에서 컴퓨터를 도입해 오는 것이 급선무였던 60년대를 지나온 우리나라컴퓨터 산업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적응기를 맞게 된다. 70년대를연 것이 바로 컴퓨터로 한글을 출력할 수 있는 라인프린터의 개발과 대량의데이터처리가 가능한 OCR/OMR(Optical Charcter/Mark Reader:광학카드판독기)의 활용이었다.

이 가운데 70년말과 71년초를 전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IBM등의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은 컴퓨터 활용의 토착화를 알리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어 71년 체신부와 문교부가 각각 전신전화요금 및 대학예비고사채점 전산화용으로 OCR을 도입한 것은 컴퓨터 활용면에서 대량의 데이터처리와업무의 신속성.정확성.경제성 등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서곡이었다.

지금은 별로 쓰이지 않는 라인프린터는 한 글자씩 인쇄하는 도트매트릭스프린터와 달리 행(line)단위로 문서를 인쇄할 수 있어 대량의 정보를 고속으로출력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은 원래 한국IBM이 68년 처음 착수했다. 그러나 완성은 이보다 1년 늦게 개발에 착수했던 KIST 전자계산실이 먼저 했다. KIST전자계산실은 70년 11월, 한국IBM은 71년 3월 각각 독자적인 한글라인프린터개발을 완료한 것이다.

한글 라인프린터가 개발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는 컴퓨터 상에서 한글을처리, 이를 곧바로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컴퓨터 도입기관들은 컴퓨터에서 처리된 문서를 영문 상태로 출력한다음 이를 한글로 번역, 인쇄소에서 재편집하는 이중작업을 벌여야 했다. 한글라인프린터의 개발요구는 70년대 들어 각 기관이나 기업의 OCR도입, 즉 데이터의 대량처리 시스템 도입이 예상되면서 필연적으로 제기됐다. KIST가 발표한 한글 라인프린터는 1분당 4만8백자(136컬럼×3백행)를 인쇄할수 있는고속제품이었다. 개발작업은 KIST전자계산실과 미국 컨트롤데이터사(CDC)에근무하는 한미양국 엔지니어들의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CDC엔지니어들이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에 참여한 것은 당시 KIST전자계산실에 설치돼 있던컴퓨터 기종이 CDC의 "CDC 3300"(69년 도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글의 인쇄는 글자들이 연속적으로 찍혀 나오는 영문알파벳 처리와 달리컴퓨터상에서 자음과 모음을 초성.중성.종성 형태로 구분해 조합해줘야 하는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쳐야 한다.

KIST전산실 성기수실장이 직접 수행한 작업은 한글의 자모 형태를 배열에따라 11종으로 나누고 이를 컴퓨터가 처리하도록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특성은 2벌식 표준자판에서 예를들어 "Aa A"처럼 풀어쓰기 형태로 글자를 입력하면 "한"과 같이 모아쓰기 형태로 찍혀 나온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프린터에서 별도의 제어장치를 새로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KIST전자계산실팀은 CDC에서 개발한 영문라인프린터에서 영문 체인을 한글 체인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KIST측은 이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에 모두 2백만원의 자금을 소요했다.

4개월 뒤인 71년 3월 한국IBM도 서독IBM 및 스웨덴IBM 등 3개국 현지법인의공동프로젝트로 IBM 컴퓨터용 한글 라인프린터를 개발해 냈다. 당시 한국IBM 전자계산실장 김성중(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의 주도로 개발된 이 프린터는 2벌식의 KIST 것과 달리 4벌식이었으며 인쇄속도도 1분당 2만6천9백여자로 훨씬 느렸다.

아무튼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로 인해 굵직굵직한 정부 전산프로젝트의발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KIST가 CDC와 함께 한글 라인프린터의개발을 성공으로 이끈 직후 착수한 사업이 바로 71년 체신부의 서울시내 전신전화요금 업무 전산화와 문교부의 대학예비고사 채점 전산화였다. 사실 이두가지 업무의 전산화는 한글 라인프린터가 개발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체신부는 70년 6월 1백50만원의 예산을 들여 체신부내 EDPS(전자식 데이터처리 시스템)기본계획을 수립한 데 이어 71년 9월까지 서울시내의 전신전화요금을 EDPS화했다. 전신전화요금의 EDPS화는 구체적으로 서울시내에서만 매일수만매씩 쏟아지는 시외 및 국제전신전화발신증 처리를 전산화하는 것이었다.

이때 체신부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KIST전산실 측의 자문을 받아들여 내외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전신전화발신증 처리용OCR시스템 "CDC OCR 936"를 도입했다.

시외 및 국제 전신전화 발신증은 내용상으로는 별게 아니어서 입력자료를읽어 그대로 자기테이프에 수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매일 수만매씩쌓이는 것을 PCS(천공카드시스템)로 처리하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KIST측은 매일 1천3백대 분의 PCS로 처리해야 할 시외 및 국제 전신전화발신증을 OCR로 처리케 함으로써 오늘날 전화 대량보급시대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줬다.

전신전화요금 전산화는 KIST전산실이 주도를 했고 CDC 등의 기술지원이 따랐다. 이때 체신부에서는 박종현(현 한국통신기술 상임감사).이영남(현 농수산물 도매시장관리공사 사장) 등이 실무책임자로 나섰고 KIST측에서는 김우영(현 하이퍼테크 대표).권순덕(현 한맥소프트웨어 대표).황대규(도미).유락균(작고) 등이, CDC에서는 이지상(현 한국소프트웨어써비스 대표) 등이 참여했다.

전신전화요금 전산화 추진은 당시로서 자금소요가 많고 성공 가능성도 많지않아 체신부로서는 대단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업이 훗날체신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정책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해줄 줄은아무도 몰랐다.

체신부는 서울시내 전신전화요금 전산화의 성공을 계기로 박종현 등을 주축으로 74년 체신부 전자계산소를 발족시키고 미스페리사로부터 대형컴퓨터"유니백1106"를 도입하면서 가입자 전신전화요금 전산화 등을 진행시켜 나간다.

70년대초 치렀던 또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바로 71년의 대학예비고사 채점전산화였다. 이 프로젝트 역시 KIST전산실이 맡아 했으며 그 주역들은 안문석(현 고려대교수).김봉일(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신동필(전시스템공학센터소장).최영화 (현 KIST부설 정보기술교육센터) 등이었다. 문교부측에서는 최지훈(현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71년의 채점전산화는 69년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처음 실시되고 난 뒤 2년만의 일이었다. 69년 첫 해는 수작업으로 처리했고 채점결과를 통해 합격자를가리는 정도의 작업에 컴퓨터가 이용됐다.

70년에는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 및 OCR 등 관련장비의 도입 전이어서 개인시험지에 직접 채점을 하고 이것을 개인별 종합성적표에 옮겨 적는 일까지가수작업으로 처리됐다. 그런 다음 전체 수험생에 대한 채점집계와 석차부여및 합격자 결정 등은 PCS를 이용해서 IBM 80컬럼 카드에 옮겨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처리 과정에서 실수와 오차를 없애기 위해 반드시 2회씩 검토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도 이 작업은 나은 편이었다. 69년 첫 해는 채점이후의 모든 통계 작업은 주산 5단 이상의 상업학교 학생 30여명이 20여일합숙하며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71년부터는 채점에서부터 합격자를 가리고, 각종 통계를 내는 모든과정이 전산화된 것이다. 포트란 언어로 짜여진 응용프로그램과 OCR의 덕택이었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최영화는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는 너무 힘든 프로젝트여서 연구원들 사이에서 기피대상 1호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답안지 입력에서 채점.사정에 이르기까지 단 한건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완벽한 결과를 요구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전산화는 교육행정분야에 대한 컴퓨터 이용이 뗄래야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사실 교육행정분야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예비고사 채점전산화보다 1년여 앞서있었던 서울시의 70년도 중학교 무시험 추첨이었다. 예비고사 채점에 비하면극히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이것은 컴퓨터를 일반인들 사이에 70년대의 "스타"로 부상시켜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동식 은행알 추첨기를 학생들이 직접 돌리는 것에 대한 불편과 잡음을없애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하자는 의견은 68년부터 나왔었다. 69년 8월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부형 78%가 70년도 입학생부터당장 컴퓨터 추첨방식을 도입하자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70년 2월3일 이 프로젝트를 맡았던 당시대한전자공업주식회사의 서울 구로동 소재 전자계산실에서 오경인 교육감이참석한 가운데 남학생 5만5천여명, 여학생 4만3천여명에 대한 컴퓨터 중학교무시험추첨에 들어갔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컴퓨터가 학생들에게 학교배정에 필요한 난수기호를 지정해 주는 일이었다. 이 난수기호는 해당 학생의 출신 국민학교.학년.반.번호.남여성별 등 5개의 조건을 입력해서 무작위로 뽑아낸 것이었다.
이날 치러진 컴퓨터 추첨은 이틀 뒤 2월5일 오교육감이 경기여고 강당에서중학교별 기호를 발표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원래 중학교 무시험추첨은 이주용(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 회장)이 소장으로 있던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가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이주용은 난수기호 지정을 위해 학생의 통학거리.버스노선.IQ분포.성적.신체조건 등의 조건을 입력할 것을 건의했으나 너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문교부 측에 의해 거절당했다.

중학교 무시험 추첨에 이어 예비고사 채점 및 전신전화요금 전산화는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서 70년대의 창을 활짝 열어주는 시발점이 됐을 뿐 아니라이후 본격화된 보사부.철도청.국방부.농림수산부.법무무 등 정부 부처의행정전산화의 전형이 됐다. 아울러 금융권 및 일반기업의 전산화에도 모범적기틀을 제공해 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29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7) 적응기 (2)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size:5t5u836i]
컴퓨터 도입이 시작된 60년대 말이 컴퓨터에 대한 경외심을 자아내게 한시대였다면 70년대 초는 컴퓨터 활용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시대가 된다. 그 촉매는 데이터통신이었다. 데이터통신은 21세기가 불과 몇 년 앞으로 다가선 오늘날 매우 복잡다양한네트워크 구조로 고도화 되면서 컴퓨터환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됐다. 정보고속도로의 건설과 인터네트의 확산붐이 그렇다. 무궁화호 같은 상업용위성의 발사가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도 데이터통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같은 현상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초부터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데이터통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컴퓨터의 데이터통신이 이루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25년전이다. 70년 6월 경제기획원 예산국(현 재정경제원 예산실)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 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전자계산실 간의 통신이 바로그효시이다.

국내 최대 용량이었던 KIST전산실(홍릉소재)의 대형컴퓨터 "CDC 3300"과경제기획원 예산국(광화문소재)의 배치터미널(Batch Terminal) "CDC 200 UT"가 체신부(현 정보통신부)의 전용선과 모뎀 장비에 의해 접속됐던 것이다.

사실 7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나라의 컴퓨터 작동 공간과 컴퓨팅 파워의 공유는 극도로 제한된 장소, 즉 전산실 안에서만 가능했다. 프로그램을 입력해서처리한 결과를 터미널을 통해 받아볼 수 있는 장소는 대형컴퓨터(호스트)가함께 설치돼 있는 전산실내부 뿐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호스트의 정보를 지역적으로 다른 곳의 터미널에서 받아볼수있게 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즉 네트워크를 통해 원격지의 컴퓨터를 공유하는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던 셈이다.

이때 KIST전산실은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국가 예산업무의 전산화(당시 용어로EDPS)요청을 의뢰받은 상황이었다. 최초의 정부기관 용역이기도 했던 이프로젝트는 KIST전산실 연구원 안문석(현 고려대교수)의 "예산업무의 EDPS화에관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진행됐다.

주요 내용은 기획원이 KIST전산실의 컴퓨팅 파워를 공유함으로써 예산사정시예산당국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료의 온라인 출력, 국회예결을 거친 예산의집행과 결산 등을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었다. 터미널설치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핵심사업단계 가운데 하나였다. "CDC 200UT"터미널은 KIST의 예산업무 EDPS 결과를 예산국이 온라인으로 받아볼 수있도록 해 주는 도구였다.

이때 예산업무 EDPS주역들은 KIST전산실 측에서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와 안문석, 경제기획원 측에서는 예산총괄과장 강경식(현 신한국당 의원)등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컴퓨터 비전문가였던 강경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시라큐스대 행정학석사였던 강경식은 69년 예산총괄과장이 되면서부터김학열부총리 겸 기획원장관(작고)에게 예산업무 전산화를 강력하게 건의하기시작했고 마침내 김부총리는 70년 4월 7일 경제동향 브리핑을 통해 박정희대통령에게 예산업무 전산화계획을 정식 보고하게 된다.

이때 브리핑을 위해 KIST 관계자들을 빈번하게 면담했던 김학열부총리가경제장관 회의때마다 "장관들, 컴퓨터공부 좀 하세요!"라고 한 말은 지금도관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에피소드이다. 김부총리의 이같은 지시(?)때문에 경제장관들이 70년과 71년 사이에 홍릉을 자주 찾게 됐고 이때마다 KIST 전체가 장관행차에 대응하느라 분주했던 장면들이 당시 사진자료들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기획원 예산국에 설치된 "CDC 200 UT" 배치터미널은 분당 3백장를 읽을수있는 카드판독기(card reader), 분당 3백줄(line)을 인쇄할 수 있는 라인프린터, 운영자(operator)용 디스플레이 콘솔(console) 등으로 구성돼 있으나호스트처럼 자체처리능력은 없는 더미(dummy)방식이었다. 여기에 미 릭슨(Ri.on)사로부터 수입해온 전송속도 3백bps급의 모뎀 "릭슨 PM 24A"가 통신장비로 사용됐다.

터미널과 모뎀의 설치에 앞서 KIST전산실은 IBM에 데이터통신 환경 및 타당성조사를 의뢰했는데 체신부의 전용선 상태가 불량, 통신이 불가능할 것이란조사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강경식은 이 결과를 무시했다. 오히려 KIST측의작업강행을 독려, 국내 첫 데이터통신 개통의 주역이 됐던 것이다.

터미널 개통식이 있은 70년 6월21일 강경식은 터미널이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라고 그 앞에서 돼지머리를 준비하고 고사를 지냈는데 다음날 한신문에서는 "최첨단 만능 콤퓨터 앞에서 고사를 지냈다"며 비아냥거리는 가십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기획원 예산국의 터미널과 모뎀 설치가 사회적으로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가를 역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CDC200 UT"와 "릭슨 PM 24A" 콤비는 이어서 국내 처음으로 "주판알 없는상업학교 교육"을 표방한 덕수상고(71년12월)를 비롯 중앙관상대(70년 11월, 현 기상청), 농림부 양정국(70년12월), 전매청(71년10월, 현 담배인삼공사) 등에도 도입 설치돼 KIST 전산실과 연결, 초창기 우리나라 데이터통신시대를 주도해 나갔다.

한편 예산국에 도입된 "릭슨 PM 24A"는 국내 최초로 도입된 데이터통신용모뎀으로 기록되고 있다. "릭슨 PM 24A"에 대한 관심은 특히 훗날 KIST전산실 내에 데이터통신그룹이 조직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고 최초의 국산 모뎀시제품 개발의 초석이 됐다.

73년 봄에 조직된 KIST전산실의 데이터통신그룹은 원격지에서 온라인터미널을 접속해서 대용량 호스트컴퓨터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당시 KIST전산실 호스트는 초대형 컴퓨터 "사이버(Cyber)72"기종으로 바뀌어 있었고 김동규(현 아주대 교수).정진욱(현포항공대 교수).한기영(현 재미실업가) 등이 초창기 멤버로 참여했다. 이 가운데 김동규는 국내 최초의 데이터통신분야 박사학위(미캔자스주립대) 소지자였다.

이어서 후배그룹으로 박희원.남석우 등이 가세하게 되면서 74년 3백bps급의국산 모뎀 시제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 모뎀 시제품 경험이 바로 오늘날국산 데이터통신장비업계 쌍두마차인 콤텍시스템과 데이타콤을 잉태시키는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데이터통신그룹이 주력했던 분야는 모뎀 시제품의 제작보다는터미널 보급이었다. 이에 따라 이기식(현 대우증권 부사장).김동규.정진욱.

박찬성(현 시스템공학센터 통신운영실장) 등이 중심이 된 별도의 터미널팀이만들어 지게 된다.

데이터통신의 핵심장비인 터미널은 크게 배치터미널과 대화형(Interactive)터미널로 구분돼 있었다. 배치터미널은 앞서 설명했던 "CDC 200 UT"와 같은구성을 하고 있고 경제기획원 등 작업량이 많은 기관에 주로 설치가 됐다.
반면 작업량은 많지 않지만 업무처리가 대화형일 경우 텔레타이프(Tele Type)와 CRT디스플레이로 구성되는 대화형 터미널이 사용됐다. 94년 KIST전산실의 "사이버72"와 전남 송정리의 삼양타이어공장의 4백km 사이에 설치된 최초의 장거리 데이터통신도 "M 38"라는 대화형 텔레타이프 터미널에 의해서였다. 삼양타이어의 터미널 설치는 초장거리(?)였던데다 국내처음으로 4천8백bps 속도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KIST전산실과 기획원 예산국간 터미널 설치 이상의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이때 정부 부처 중에서는 유일하게 과학기술처 내 장관실 옆에 이 텔레타이프 한대가 설치돼 있었는데 이 터미널에 대한 에피소드는 오늘날 듣는 이로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고 있다. 어느 해인가 과기처 연두순시를 나선박정희대통령은 이 터미널을 보며 "우리나라에 소와 닭이 몇 마리나 되는가"라고 물었고 이 터미널은 즉석에서 끝자릿수까지 자세하게 답하는 위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대다수의 텔레타이프 터미널 또는 배치터미널들은 각종장애로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 관계자들을 골탕먹이는 일이 많았다.
특히 각종 행사 때 운영자들이 터미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참석한 기관장또는 사장의 얼굴이나 "축 환영"과 같은 글자를 코딩해 라인프린터를 통해찍어내곤 했는데 하필 그때마다 고장을 일으켜 보는 이들을 민망케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당시 터미널의 장애는 회선불량과 함께 전화국 직원들의 데이터통신이나모뎀에 대한 이해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예컨대 통신회선의 점검 같은 작업들이 음성통신에만 의지하여 치러지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70년대 초가 사람들에게 컴퓨터 활용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켜 준시대가 된 것은 바로 이같은 장애요인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컴퓨터가 모든 일을 장애없이 척척 처리해 줬다면 사람들은 컴퓨터에 대한환상은 그만큼 줄어들었을 터이다. 환상은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일수록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70년대의 한때를 풍미했던 컴퓨터 앞에서의돼지머리 고사는 모든 장애귀신(?)들을 쫓고자 하는 가장 합리적인 축원의방법이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2.0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8) 적응기 (3) 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size:5t5u836i]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한 곳은 69년1월 서강대였다.

서강대는 미스페리랜드(현 유니시스)가 제작한 "유니백 솔리드스테이트(SS) 80"기종을 당시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던 미미네소타 주립대학으로부터기증받았다.

도입에 앞서 서강대는 경제학박사 김만제(현 포항제철회장)와 물리학박사박병소(현 서강대교수) 등 소장파 교수들을 주축으로 68년11월 국내 처음으로대학부설 전자계산소를 설립하는 등 만만의 준비를 갖췄다. 서강대의 컴퓨터도입 과정이나 부설 전자계산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방식 등은 훗날 다른대학들의 귀감이 됐음은 물론이다.

연세대도 같은 해 10월 당시 박대선총장의 주선으로 미유나이트 포드재단으로부터 또다른 "유니백 SS 80"기종을 기증 받았다. 하지만 이들 "유니백SS 80"는 컴퓨터 세대 구분상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2세대 기종으로서 모두중고품이었다. 조작할 전문요원도 부족했던 데다 고장까지 잦아 작동시간보다는 멈춰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용도 폐기직전의 낡은 기계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스페리랜드의 국내 판매회사였던 한국유니백 관계자들까지도"고물기계"로 낙인찍었을 정도였다. "유니백 SS 80"는 그러나 당시 다른 대학들이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서강대가 유니백SS 80"를 도입한 직후 69년 5월 한양대가 3차 대일청구자금으로 일본 후지쯔로부터 "파콤230 10"을 들여왔고 해를 넘기기 직전인 12월말에는 숭실대가 IBM의 "IBM 1130"를 도입했다.

70년 5월에는 서울대가 전자계산소 발족과 함께 문교부 예산으로 IBM의 "IBM 1130"를 도입했다. 이어서 71년 10월과 72년 4월에 중앙대와 동국대가각각 같은 "IBM 1130"기종을 도입했다.

이밖에 70년대 초반 다른 곳보다 앞서 컴퓨터를 도입한 대학들로는 73년2월의 광운공대("IBM 230/15"), 74년9월의 홍익대("CDC 3200") 등을 빼놓을수없다. 이들 대학의 컴퓨터관련 학과들이 지금까지도 대학 입시생들로부터인기가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사실들과 무관치 않다.

70년을 전후하여 대학들이 컴퓨터 도입을 서두른 것은 컴퓨터에 눈 떠가는사회 전반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의 실습교재로는 물론 과학계산등 교수들의 연구분야에도 절대 필요했다. 또 과중해지는 학사행정 전산화에대한 당면과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도도하게 밀려오는 사회 전반의 전산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재양성은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학자들은 우리나라 지도층도 선진국의 정보화 물결과 컴퓨터의 실용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글을 연일 신문이나 잡지.
학회지 등을 통해 설파하고 나섰다. 미국의 "아폴로"계획이 컴퓨터로 진행되고있다는 사실은 좋은 본보기였다. 그러나 당시 대학의 재정은 당장 시급한것도 아닌 컴퓨터를 도입하는데 예산을 낭비(?)할 만큼 풍부하지 못했다. 또도입을 주장하는 교수들 역시 극소수의 소장파에 불과해 불리한 상황이었다.

서강대가 컴퓨터를 도입한 과정을 기록해 놓은 전자계산소(컴퓨터센터)일지를 보면 당시 대학들의 컴퓨터 도입여건이나 전반적인 국내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지는 예컨대 미국에서 컴퓨터를 기증받기는 했지만 막상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각 부분품들을 연결하고 설치하는 기사가없어 2개월간 아무 작업도 할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결국 일본인 엔지니어마사히토 야마모토를 불러 1개월 만에 설치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며 컴퓨터를 들여온 대학들의 인재양성상황은 컴퓨터를 도입하지 못한 대학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초기 대학에도입된 컴퓨터는 학생 실습용이나 교수 연구용으로서보다는 학사업무와 행정자동화 용도로 더 위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컴퓨터를가르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드물었고 체계적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이나 교재는더더욱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 대학에서는 컴퓨터개론 위주의 EDPS 강좌를 교양과목 또는 선택과목으로 개설해 놓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같은 산발적 강좌로는 거센 전산화 물결을 능동적으로 맞이할 고급 인재양성에는 턱없는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과감하게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자 시도한 곳은 숭실대였다. 70년도 신학기부터 이 대학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자계산학과를 공과대학내에 설치하고 30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대학 컴퓨터교육의 체계적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숭실대에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는데 산파역을 맡은 이는 당시 전자공학과교수이자 부설 전자계산소장이었던 김기용(현 홍익대 교수)이었다. 김기용은당시에 69년초 경제기획원이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다가 유한양행으로 넘겼던"IBM 1401"을 임시로 빌려 필요한 학사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틈틈히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개강좌를 해오던 터였다.

김기용은 숭실대 총장으로 특명을 받아 68년 초부터 전자계산학과 설치를위한 연구조사작업에 나섰다. 이때 김기용이 참조한 것이 바로 미국의 대학들이 채택하고 있던 소위 "커리큘럼69"이었다. "커리큘럼69"을 기준으로 전자계산학과의 교과목들이 정해졌고 69년12월 최신 대형 컴퓨터인 "IBM 1130"이도입됐던 것이다. 김기용은 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전자계산학"을 직접 집필, 출간하기도 했다. "전자계산학"은 68년 송길영(현 고려대교수)이 펴낸 "전자계산기 입문"과 함께 당시로서는 몇권 되지 않은 한글판컴퓨터교재였다.

숭실대를 계기로 71년 중앙대가, 72년에는 동국대.광운공대.홍익대 등이잇따라 전자계산학과를 개설하고 신입생 모집에 나섰다. 72년 신학기 때 이들5개 대학의 전산학과 신입생 정원은 숭실대와 홍익대가 각각 50명, 중앙대와광운공대 각각 30명, 동국대가 40명 등 모두 2백명에 이르렀다.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관련학과에 컴퓨터 부전공 제도를 두고있었던 곳은 서울대 응용수학과, 연세대 응용통계학 등이었다. 이밖에 서강대 전자공학과, 경희대 이공대학, 명지대 전자공학과, 부산대 공대 등이선택과목 또는 교양과목으로 컴퓨터관련 교과를 개설해 놓고 있었다.

대학원의 경우는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설치보다 먼저 관련학과가 개설돼운영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학원 관련학과의 설치는 68년 성균관대 경영대학원의 전자자료처리학과가 효시였다. 이 학과를 설치한 주역은 우리나라경영학박사 제1호로 알려진 서남원(현 고려대 교수). 고려대에 재직중이던서남원은 성균관대로 옮기면서 당시 권오익총장과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것을전제로 경영대학원에 전자자료처리학과를 설치하고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고급 경영정보시스템(MIS)관리자 양성이 학과 설치의 첫째 목적이었다.
서남원은 성균관대에 컴퓨터가 도입되기까지 육군의 "유니백 9300"와 한국무역협회의 "NCR C 100" 등을 빌려 학생들의 실습을 도왔다. 이 당시 성균관대 전자자료처리학과를 수료한 이들이 조이남(현 금융결제원 상무).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유경희.로연후(현 대검전산담당관) 등이다.

서남원은 이후 71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으로 복귀하고 성균관대 전자자료처리학과와 유사한 전자정보처리전공 과정을 개설함으로써 국내 대학원 전산관련학과 설치 1, 2호의 주역이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고려대로 복귀한것은 성균관대 권총장이 컴퓨터도입 약속을 2년이 넘도록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0년대를 전후한 이 시기에 대학에서 컴퓨터관련 인재양성에 나섰던 교수들로는 숭실대 의 김기용(현 홍익대 교수)과 송후봉(현 숭실대 부총장), 중앙대의 이태원(현 고려대교수), 동국대의 안사명, 서울대의 김영택과 안수길(현 명예교수), 연세대의 한만춘과 박규태, 고려대의 서남원과 송길영, 광운공대의 김경태(작고), 한양대의 김경기(작고), 한국과학원(현 KAIST)의 박찬모(현 포항공대교수)와 조정완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72년에는 숭실대 등 대학에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고 있던 5개 대학전산소장이 발기인이 돼 컴퓨터 분야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학회명칭을 사용한전자계산학회를 발족시켰다. 학회의 발족은 컴퓨터가 대학에서 학문의 소재로 정착됨에 따라 이에 대한 연구기반의 조성과 사회적 협력의 필요성에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계산학회는 과기처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채 표류하다 73년3월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등 연구소와 은행.기업 등 업계의 엔지니어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한국정보과학회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재탄생된다.

KIST소장 한상준(현 한양대 명예총장)을 회장, 서남원과 서울대 교수 이우한등을 부회장으로 해 발족된 한국정보과학회는 오늘날 수 천명의 회원을 가진국내 최대 규모의 학회로 발전했으며 정보통신분야 산학협동의 산실로 통하고 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2.1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5t5u836i]컴퓨터 파노라마 (9) 적응기 (4) 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size:5t5u836i]
컴퓨터 도입과 함께 몰아닥친 전산화의 물결은 금융기관에도 예외일 수는없었다. 60년대말의 전산화 물결이 정부기관에 집중됐다면 70년대 초반의 전산화물결은 금융기관 특히 은행 쪽으로 모아졌다.

70년대 은행 전산화 대상업무는 크게 두가지 였다. 첫째는 한일은행.상업은행 등 시중은행이 추진했던 은행 사무자동화, 두번째는 사무자동화 다음단계로 본점과 지점간 고객의 입출금처리 및 조회업무를 즉시 자동화하는 온라인뱅킹 등이다.

물론 6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행.기업은행 등 국책은행들은 카드천공시스템(PCS)을 도입, 은행 고유업무와는 거리가 있는 조사통계업무를 처리해 오고있었다. 그러나 PCS는 일반은행들이 60년대 말부터 컴퓨터를 직접 도입하는계획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은행들이 고유업무에 대한 전산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컴퓨터를 전혀 보유하고 있지 못했던 은행들은 전산관련 업무를 자체 처리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이때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컴퓨터 용역기관이 바로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이다.
한국전자계산소는 67년 설립과 함께 한국은행.한일은행 등으로부터 정기적금및 환대사 업무 용역에 나서게 된다.

한국전자계산소의 용역업무를 계기로 조사통계업무의 PCS처리에 머물던 은행전산화는 은행업무 전산화는 환경 면에서 큰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그 첫신호로 왼환은행이 67년 설립과 함께 기획조사부내에 사무개선과를 신설하고미국 NCR사로부터 "NCR센추리-100"을 발주하게 된다. 뒤이어 상업은행이 68년 컴퓨터도입 및 활용을 위한 조직으로 사무부를 신설하고 한국유니백을 통해 미국의 스페리랜드사(현 유니시스)로부터 대형컴퓨터 "유니백9400"도입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상업은행의 컴퓨터 도입계획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상업은행이 도입하려 했던 "유니백9400"은 69년10월 창설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 산하 금융단 전자계산본부(KBCC)가 승계 인수했다.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는 일종의 은행사무자동화 공동추진위원회같은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실무 상설기구가 바로 KBCC였다. 80년대 후반비로소 눈뜨기 시작한 은행간 인터뱅킹 즉 금융전산망 추진의 징검다리를 놓은것도 바로 이 KBCC이다. 여기서 잠깐 KBCC의 탄생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0년대 말은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추진과 함께 경제규모가 팽창하기시작했고 그 결과로 금융부문의 양적 성장을 가져오던 시기였다. 여수신업무량.점포수.은행원 등의 급속한 증가가 이뤄어졌던 것이다. 새로운 은행 신설도잇따랐는데 이때 설립된 은행들이 외환은행.주택은행.신탁은행 등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은행간 경쟁체제를 의식하게 됐고 인건비 절감과 사무개선, 즉 생상성 향상을 위해 저마다 컴퓨터도입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은행들의 독자적 전산화 움직임은 은행의 대중화와 경쟁체제의 도입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 우려감도 적지 않았다. 은행감독원은컴퓨터를 먼저 도입했던 기관의 시행착오 사례를 들어 은행의 독자적인 컴퓨터도입과 운영에 난색을 표명하고 나섰다. 컴퓨터 도입에 따른 비용조달과인력확보도 먼저 선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때 주무부처인 재무부 이재국장이던 장덕진(현 대륙개발 회장)이 마련한것이 "적 금융기관 EDPS화 통합운영방안"이라는 것이었다. 골자는 막대한 컴퓨터 도입비 절감과 인력확보, 시행착오 예방 등을 위해 모든 금융기관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공동이용센터를 마련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13개 은행이 공동출자, 금융기관 사무기계개발위원회를 창설했고 그산하기관으로 KBCC를 두게 됐던 것이다.

KBCC는 69년10월 상업은행이 발주했던 "유니백9400"을 인수하면서 정식 업무를 시작했다. "유니백9400"과 함께 상업은행이 독자적으로 확보했던 인력및노하우까지 그대로 승계한 KBCC는 7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적 산업분야를 걸쳐최초의 컴퓨터공동이용센터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가운데서도컴퓨터 도입 비용과 위험부담의 공동부담, 각종 표준화작업과 시스템 개발, 은행간 공동업무 개발 등의 성과는 70년대 적응기로 접어든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에 하나의 획을 귿는 중요한 업적이 됐다.

KBCC는 각 은행의 급여업무와 적금처리업무를 수탁처리하는 일과 함께 당시로서는 절대 부족했던 전산요원 양성과 조사업무에도 힘을 썼다. "언더스탠딩 컴퓨터"나 "코볼언어" 등 서적들을 직접 펴냈고 일본과 미국 금융기관의컴퓨터 도입사례 연구를 통해 "은행업무의 EDPS화의 효율적 방안" 등과 같은대정부 보고서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KBCC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 은행들의 컴퓨터 공동이용은 한계에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은행업무의 폭주에 따른 컴퓨터 용량의 한계 때문이었다.

컴퓨터 용량의 한계는 사실 KBCC의 발족부터 에견돼 오던 일이었다. 제 아무리 큰 용량이라 하더라도 13개 회원은행의 용역을 제 시간에 처리해 준다는것은 무리였다. 매달 하순부터 다음달 초순경에 걸쳐 정기적으로 발생하는업무집중현상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업무과중으로 하드웨어 고장이라도일으키는 날이면 고쳐질 때까지 업무가 중단돼야 했던 것이다.

한계에 부닥친 두번째 이유는 은행업무의 성격상 용역 처리할 수 있는 것과그렇지 못한 것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KBCC가 처리한업무는 단순 집계업무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이미 60년대 말부터 보편화되기시작한 온라인 뱅킹이라든가 과목별 온라인과 같은 본격적인 은행업무 처리는 KBCC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은행들은 나름대로 경영여건이 호전되기 시작했고 자체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고는 처리할 수 없을 만큼 업무가 폭주하기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정부는 75년1월 금융업무 전산화에 대한 정부방침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주요 내용은 금융기관전산화 종합육성계획수립, 지로(GIRO) 및 어음교환업무의 기계화 개발(시스템개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의 은행에 대한 컴퓨터 도입 심의 등이었다. 이 방침 가운데 눈여겨 볼 대목이 바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의 컴퓨터 도입심의이다. 결국 금융기관 마다의 특성과 업무폭주로 인해 정부는 은행의 자체 컴퓨터 도입을 권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같은 정부방침이 나온 직후인 75년 4월 농협중앙회가 처음으로 "유니백9480"을 도입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상업은행이 후지쓰로부터 "파콤230-48"을들여오게 됐다. 이어 76년에 국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이, 77년에 조흥은행.

제일은행.한일은행.한국은행 등이 잇따라 컴퓨터시스템을 자체 비용으로들여오게 됨으로써 은행자체 전산화시대가 열렸다.

은행 자체 전산화시대가 열림에 따라 KBCC의 위상이나 역할도 재정립할 필요성이 요구됐다. 결국 KBCC는 사단법인 금융기관 전자계산소로 바뀌면서 융업무전반에 걸친 종합전산화 계획을 수립, 관리하는 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금융기관전자계산소는 77년6월 은행지로관리소로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86년6월 어음교환관리소와 통합, 금융결제관리원으로 재탄생되면서 금융전산망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한편 70년대 초반 주요 은행들이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를 통해 컴퓨터의공동이용에 만족하고 있을 즈음 외환은행은 KBCC에 가입하지 않고 처음으로부터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나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외환은행은 70년 1월 "NCR센추리-100"의 도입을 완료하고 독자적인 컴퓨터 운영에 들어갔던 것이다. 68년말에 컴퓨터 도입계획을세웠던 상업은행과 달리 외환은행이 정부의 권고를 뿌리치면서까지 KBCC에가입하지 않았던 것은 은행설립(67년1월) 5~6개월 전부터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온데 따른 자신감에서였다.

외환은행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본점과 지점간온라인뱅킹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외환은행은 바로 국내에서 첫 온라인뱅킹의실현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헤 컴퓨터 도입 이전인 68년부터 NCR 한국대리점이었던 동아무역(현 동아컴퓨터)을 통해 전산요원 교육에 나섰다. 또 전산요원들을 수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 온라인뱅킹시스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외환은행은 마침내 72년11월28일 미국에서 새로 도입한 "NCR센추리-200"및온라인용 패키지와 일본NCR의 기술지원에 힘입어 국내 처음으로 서울과 부산간 온라인 개통에 성공하게 된다. 서울본점의 호스트를 전화선을 통해 부산지점의 "NCR 42"터미널과 연결한 것이다. 을지로전화국-동대문시외전화국-대전중계소-부산시외전화국 등 무려 9군데의 중계국과 중계소를 통한 연결이었다. 바로 이같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일본NCR의 기술진들이 난색을 표명했음은 물론이다.

개통 후 외환은행은 보통예금과 종합가계예금의 송금 및 결제업무를 온라인을 통해 수행했고 대상지역도 인천.대구.마산 등으로 넓혀갔다. 외환은행의노력에 대한 결실은 이후 74년 대한항공의 좌석예매온라인 시스템 가동과75년 이후 본격화된 타은행 온라인뱅킹시스템 도입과정에 교과서가 됐다.

외환은행의 온라인 가동은 당시 행장이던 김우근(현 한국산업개발투자 고문)의 집념에서였다. 김우근의 애당초 목표는 서울과 인천지점간의 온라인뱅킹이었다. 서울 부산간 온라인뱅킹시스템 개통 후 김우근은 한 인터뷰에서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정한 1일 생활권 실현을 꿈꾸었는데 71년 미국출장중 LA와 뉴욕간 송금및 결제가 온라인으로 처리되는 것을 보고 서울-인천간에서 서울-부산간으로바꿔 결심하게 됐다."

금융권에서는 지금도 진정한 1일 생활권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에서보다는서울부산간 외환은행의 온라인뱅킹 개통에서 실현됐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2.26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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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정부 및 공공기관.교육기관.기업들의 컴퓨터 도입은 나날이 증가했다. 과기처 조사에 따르면 69년 말까지 불과 17대였던 국내컴퓨터 도입대수가 71년 36대, 73년 66대에 이어 75년에는 1백29대로 급증하는 등 2년을 주기로 거의 1백%씩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시대별로 살펴보면 60년대 말까지 초창기 컴퓨터도입은 정부 및 공공기관이주도했고 70년대 초반은 금융기관.교육기관이 많았다. 기업은 72년께부터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75년의 경우 도입된 전체 39대 가운데 60%가넘는 24대가 기업의 몫으로 나타나고 있다.

70년대 컴퓨터도입의 증가는 금융 및 제조 분야에서 기업의 외형과 업무가팽창함에 따라 전산처리 수요가 급증했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입비용이 낮아진 데 따른 것이었다.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7년-71년)의 성과와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진입시점에서 정부가 기업 등을 대상으로 컴퓨터도입을 적극 유도한 것도하나의 이유가 됐다.

90년대와 비교하면 1백여대 내외의 숫자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70년대 중반까지는 어느 기관 또는 어느 기업이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뉴스가 됐다.

전산실 개통때면 기관과 기업에 관계없이 정부 고위인사가 참석, 테이프를잘랐다.

산업현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성역화도구로서 컴퓨터는 70년대 경제부흥의최선봉장으로 추앙을 받았다.

컴퓨터를 도입했거나 도입예정인 기관과 기업들은 대통령이나 장관, 또는기업총수가 산업현장을 순시할 때마다 몇년 이내에 몇%의 인력절감.경비절감.생산량 증가와 같은 수치를 내놓는 것이 유행병처럼 번졌다.

컴퓨터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겠지만 전산실만 구경한 사람들이 라디오나 TV에 출연해서 만능기계나 지능로보트 쯤으로 컴퓨터를 설명해 대는 통에 당시전문가들이 애를 먹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적잖게 구전돼 오고 있다.

한 출판사가 "콤퓨터 국어"니 "콤퓨터 수학"이니 하는 이름의 참고서를 출판해서 큰 돈을 벌었다는 얘기도 이때 등장했다.

실제 70년대 들어 컴퓨터는 만능기계로서 중학교 무시험추첨, 대학 예비고사채점, 서울 부산간 외환은행 온라인뱅킹 등 적잖은 신화를 창조해 냈다.
이와중에서 비록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미국의 복싱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와 로키 마르시아노간 시공을 초월한 헤비급 타이틀매치는 일반인들의 컴퓨터 신드롬을 극에 달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71년 2월 21일 동양텔리비전(TBC)을 통해 방영된 이 경기는 당시까지 역사상단 2명뿐이던 무패의 챔피언끼리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복싱경기 그 자체만으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러나 이 복싱경기는 실제 경기가 아닌 영화였다. 그도 그럴것이 캐시어스클레이(75년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는 29전승 가도를 달리던 WBC헤비급현역 챔피언이었고 이미 56년에 49전승의 무패 신화를 남기고 은퇴한 로키마르시아노는 영화가 제작되기 1년여 전에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던 터였다.

"슈퍼 챔피언(Super Fighter)"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미국의 한 기획자에의해 과거 경기의 TV중계 필름 등을 합성해서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기 필름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챔피언들의 훅.잽 등몸동작이나 펀치 교환회수를 비롯해 경기 중 버릇.특징 등 경기운영 스타일을분석한 컴퓨터 데이터를 토대로 구성한 시나리오에 의한 필름 편집이었던것이다.

당시 이들 데이터분석에 동원된 컴퓨터는 당시로서 성능이 가장 뛰어나다고평가 받고 있던 미NCR의 "NCR 315"기종이었다.

이 영화는 결국 46세의 할아버지 복서 로키 마르시아노가 26세 혈기왕성한캐시어스 클레이를 13회에 KO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컴퓨터로 분석한 데이터의 결과가 영화 스토리를 그렇게 이끌어 간 것이다.

"슈퍼 챔피언"은 영화역사에서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컴퓨터 합성 또는 컴퓨터 데이터에 의한 시나리오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TV 등에서는 19세기 초반에 생존했던 피아노 천재 쇼팽과 금세기 최고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루빈스타인과의 가상 피아노연주 대결 등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이같은 컴퓨터신화는 이른바 컴퓨터 마인드 확산에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든 신화의 속성이 그렇듯 컴퓨터신화 역시, 생성과정보다는 결과만 중시됐고 실패나 악의 측면에 앞서 성공이나 선의 형태로 확대 포장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언론에 비친 컴퓨터의 모습도 본래 기능이나 성질과는 무관한 이를테면,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가십거리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슈퍼챔피언"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가십거리는 당시 실무자들이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을 설득할수 있는 시청각교재(?)로서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것이었다. 당시 정책결정자들이 얼마나 무지했고 관료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70년대의 한 일화가 있다.

당시 기업들의 반도체산업 육성 건의가 잇따르자 상공부 담당국장은 실무책임자에게 반도체가 무엇이며 왜 육성해야 되는가를 조사.보고토록 지시했다. 전전긍긍하던 책임자가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6.25때 동강난 한강철교장면을 보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강물이 가르고 있는 두 뭍을 연결해 사람과자동차를 통행시키는 다리 그림이었다.

다리 부분에 교각처럼 여러 가닥의 리드프레임이 뻗어나와 있는 반도체 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즉 반도체를 동맥같은 개념으로 설명한 셈이다.
당시 국장이 반도체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우리나라 반도체산업 육성결정이 이같은 배경에서 내려졌다는 점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고이 책임자는 회고하고 있다.(이광호 전상공부 전자부품과장)정부 관료들의컴퓨터에 대한 이해도 반도체 수준에 못지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제개발에 컴퓨터를 적극 이용하고자 했던 박정희대통령은 각료들이나 비서진들이 컴퓨터에 문외한이라는 사실에 늘 불만이었다.

이 때문에 박대통령은 자신이 컴퓨터를 직접 이해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당시 컴퓨터활용이 가장 활발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을찾았다.

이때마다 전산실장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는 박대통령이 만족할 만한컴퓨터 능력들을 시연해 주곤 했는데 당시 KIST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한번은 성실장이 어거지로 레지스터(Register)를 조작하여 (별로 의미도 없는)컴퓨터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려보이기도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이명재부산대 교수)

한편 사회 전체가 컴퓨터의 신기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을 무렵인 73년 10월 이른바 서울 반포AID차관아파트 부정추첨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된 이 기사를 부패한 정부 관리가 개입한 추문사건쯤으로 생각하고 읽어 내려가다 아연실색하고 만다. 사건 내막에 컴퓨터가깊숙하게 개입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포AID차관아파트는 정부가 서울 강남지역 개발계획에 따라 미 국제개발국(AID) 자금을 들여와 짓고 있던 대규모 아파트단지였던데다 입지여건도 좋아분양 전부터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당국은 일반인들의 입주신청이 몰리자 최종 입주자선정을 컴퓨터를 통해 추첨해 내기로 하고 그 용역을 과기처산하에 있던 중앙전자계산소(NCC.현 총무처 정부전자계산소)에 맡겼다.

NCC가 이 추첨건을 맡게 된 것은 당시 국내 도입된 컴퓨터 가운데 최대인1백31KB의 용량을 가진 "유니백1106"을 보유하고 있었던데다 정부산하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부정이 개입할 소지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건은다름아닌 NCC소속 프로그래머 정모에 의해 저질러졌다. 정은 수 십명의 입주신청자들로부터 뇌물 청탁을 받고 추첨프로그램 처리과정을 임의로 조작하는방법을 통해 이 가운데 9세대 분을 부정 당첨토록 한 것이다.

NCC의 추첨프로그램은 컴퓨터 기능의 한계때문에 데이터의 처리과정이 콘솔(Console Printer)이라는 감시용 출력장치에만 나타나고 오래 보관할 수있는 디스크장치에는 남을수 없도록 짜여져 있었다. 따라서 이 콘솔장치의출력과정만 조작하면 논리적으로는 완전범죄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시스템상의 허점을 간파한 정은 청탁자들이 당첨될 수 있도록 시스템 처리과정을 변경시킨 25장의 프로그램카드를 별도 작성하고 이를 정상적인 프로그램카드에 끼워넣고 컴퓨터에 입력처리한 다음 최종 프로그램 컴파일 과정에서 다시 25장의 카드를 빼내는 수법을 사용했다. 즉 콘솔장치에 부정한 25장의 카드처리 흔적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완전범죄일 것만 같았던 이 부정추첨사건은 청탁과정에서 정에게 불만을샀던 NCC직원의 검찰투서에 의해 드러났다. 실제 당첨된 9세대 가운데 5세대가NCC직원이었다.

이 사건은 국내에서 최초로 발생한 컴퓨터범죄였던데다 프로그램 개발과정에직접 참여했던 프로그래머가 범인이었다는 점에서 사회 일각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줬다. 조작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많고 다양한 형태의 컴퓨터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고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포AID차관아파트 사건은 엄청난 컴퓨터 신드롬에 빠져있던 많은일반인들에게 컴퓨터의 본질에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점에서 또다른 측면의 평가가 내려지기도 했다. 만능으로만 여겨졌던 컴퓨터가 사실은 "손을 봐줘야 할 곳이 많은" 엄청난 허점투성이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