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파노라마 [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2

예전에 읽었던 "컴퓨터 파노라마" 란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국 컴퓨터사를 정리한 기사인데… 한동안 기억속에서 잃어 버리고 있다가 오랜만에 하드디스크를 정리를 하면서 찾아냈습니다.
이제는 전자신문 사이트에서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여러분들과 공유를 하고 싶어 올립니다.
혹시나, 저작권등의 문제가 있을시에는 "주인장님…" 삭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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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size:3jox9q8u]

차례
1.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2.도입기 (1) 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
3.도입기 (2)
4.도입기 (3)
5.도입기 (4) 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
6.적응기 (1) 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
7.적응기 (2)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
8.적응기 (3) 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
9.적응기 (4) 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
10.적응기 (5)
11.적응기 (6) 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
12.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
13.적응기 (8) 최초의 국산 컴퓨터 「세종1호」
14.적응기 (9) 한국IBM의 터잡기
15.도약기 (1) 대학의 고급인력 양성
16.도약기 (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17.도약기 (3) 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
18.도약기 (4) 삼성전자와 휴렛패커드
19.도약기 (5) 컴퓨터 국산화의 세가지 갈래
20.도약기 (6)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과 마이크로컴퓨터
21.도약기 (7) 충북도청 행정정보시스템 시범사업
22.도약기 (8) 전경련 보고서와 과학기술처
23.도입기 (9) 컴퓨터 원격탐사로 섬을 발견하다
24.도약기 (10)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대 전자관련연구소
25.도약기 (11)
26.방황기 (1) 컴퓨터 도입 승인기준이 마련되다
27.방황기 (2)
28.방황기 (3) PC산업의 태동
29.방황기 (4) 체신부의 부상 … 전기통신에 정보통신 접목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
<114전화안내시스템>
<전자식 공중전화기>
30.방황기 (5) 1981년 선거개표 방송
31.방황기 (6) 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나다
32.방황기 (7) 청계천 전자상가
33.방황기 (8)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등장-명필
34.방황기 (9)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
35.방황기 (10) 정보산업 육성과 대통령의 관심
36.방황기 (11) 교육용PC보급 계획-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37.정착기 (1) 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
38.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
39.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40.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
41.정착기 (5) 2.18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42.정착기 (6)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
43.정착기 (7)
44.정착기 (8)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하)-행정망 사업
45.에필로그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1) 적응기 (6) 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size:3jox9q8u]

60년대말부터 70년대말까지의 10여년 사이 우리나라의 주요 기관과 기업들이도입한 컴퓨터 대수는 4백27대에 이르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70년대중반부터 중대형급 컴퓨터의 도입비율이 감소하는 대신 미니컴퓨터의 도입이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함께 규모가 작은 공공기관이나중견기업들의 도입비율도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60년대말까지 우리나라에 도입된 10여종의 컴퓨터은 IBM의 "S/360". 일본 후지쯔 신기제작소의 "파콤". 컨트롤데이터의 "CDC". 스페리랜드의 "유니백" 등 고가의 중대형 컴퓨터들이 주류를 이뤘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같은현상은 분명하게 제동이 걸린다. 바로 데이터제너럴(DG)의 "노바(NOVA)". 디지털이퀴프먼트(DEC)의 "PDP". 왕래버토리즈의 "왕(WANG)". NCR의 "센추리(Century)". 버로스(Burroughs)의 "버로스" 등 미국회사들의 미니컴퓨터 기종들이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미니컴퓨터 기종은 세계적으로 반도체기술의 급진전에 따라 중대형급에비해 도입가격이 최고 10분의 1까지 저렴하면서도 성능차이는 그다지 크지않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컨데 72년 KIST 방식기기 연구실이 도입한 3대의 "노바01/1200"기종은 주기억용량이 각각 16.32.48kB였는데 구입비용은 합쳐서 6만달러에 불과했다. 4년전 68년 육군 경리단에 도입됐던 스페리랜드의8kB의 "유니백9300"이 20만달러, 67년에 도입됐던 "IBM 1401"은 월 사용료(임대료)만 9천달러였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72년부터 75년까지 "노바" 등 미니컴퓨터를 도입한 곳을 보면 KIST 방직기기연구실. 행양개발연구소. 해군본부.동국제강.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강원산업.목포상고.동양시멘트.삼화고무.국제전기 등 30여곳 40대에 이른다. 이기간동안 국내에 도입된 컴퓨터 전체 93대의 40%가 넘는 비율이다. 컴퓨터가정부 부처와 규모가 큰 공공기관 및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보여주는 것이었다.

미니컴퓨터의 부상은 컴퓨터에 대한 활용의 폭이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점에서 사용자층 뿐만 아니라 컴퓨터업계에도 새로운 기운을 불러왔다. 60년대말까지 우리나라 컴퓨터업계는 사실 업계라고 일컬어질 만한 규모였거나수준은 결코 못되었다. 이때까지 나타난 컴퓨터 관련 기업은 모두 합쳐 10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컴퓨터업체로서 명함을 내밀 수 있었던 곳은 한국IBM.한국유니백.컨트롤데이타코리아(CDK) 등 기종 공급회사와 공공기관 형태의 한국전자계산소(현 주식회사 한국전자계산).KIST 전자계산실(현 시스템공학연구소).서울컴퓨터센터(현 서울정보처리학원) 등 용역서비스 기관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72년 5월 인터내셔널데이터코퍼레이션(IDC)을 필두로 한국뉴콤. 인터내셔널 데이터스템 코퍼레이션(IDsC). 동양시스템산업(OSI). MC인터내셔널. 금호실업 전자전기사업부.동양전산기술 등 미니컴퓨터 전문 공급회사가 잇따라출범하면서 컴퓨터 분야는 독자적인 산업으로서 그 영역을 확보하려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 컴퓨터를 도입하려는 기관이나 기업들이 급증하면서시장개념이 생겨나고 공급회사들의 제품경쟁이 본격화될 기미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니컴퓨터 공급회사들의 등장으로 가장 긴장한 곳은 기존의 중대형 컴퓨터공급회사들이었다. 미니컴퓨터 기종의 이른바 가격대비 성능의 우수성 입증으로 중대형 컴퓨터 공급회사들의 대응책 마련이 본격화됐다.

한국IBM의 경우 69년말 38명에 불과했던 직원이 75년말에는 1백20명으로늘고 같은 기간동안 자본금도 1억9천만원에서 20억8천만원으로 증가했다. 스페리랜드는 한미 합작법인이던 한국유니백의 조직을 인수, 71년 현지법인 스페리랜드코리아(현 한국유니시스)를 출범시켰다. 또 일본에서 제품을 직접공급해오던 일본의 후지쯔 신기제작소는 74년 화콤(파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했고 중형급 NCR기종을 공급해오던 동아무역 역시 본격적인 영업활동을 위해 75년 동아컴퓨터를 별도 출범시켰던 것이다.

70년대 미니컴퓨터의 등장은 아무튼 국내 컴퓨터시장을 본격적인 경쟁체제로몰아가면서 독자적인 산업체계로 부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그 주역들로는 DG의 "노바 01".왕래버러토리즈의 "왕 2200B".DEC의 "PDP 8/E" 등 미니컴퓨터 3총사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 가운데 "노바01/1200"은 72년 5월 DG의 총판으로 출범한 인터내셔널데이터코포레이션(IDC)에 의해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72년 10월의 KIST 방식기기 연구실이 "노바01/1200"의 첫 고객이다. KIST방식기기실은 나중에 이기종을 모델로 최초의 국산컴퓨터 "세종1호"를 개발한 곳이기도 하다.

IDC는 60년대말 한일은행.한국전력 등에 NCR의 전자식 회계처리기를 공급한바 있는 동아무역에 근무하던 이명진이 일본 샤프전기의 지원아래 설립한회사였다. 이명진은 동아무역 직원으로서 일본 NCR를 드나들다 샤프전기와손이 닿았고 71년부터는 아예 샤프전기 해외사업부 서울주재원으로 자리를바꿔 앉았다.

IDC의 "노바01/1200" 국내 공급실적은 그러나 신통치 않아 KIST 방직기기연구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IDC는 73년 7월 샤프로부터 출자금을지원받아 한.일합작 샤프데이타코리아(현 한국샤프)로 재출발하면서 전자수첩판매회사로 업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노바 01" 국내공급은 73년도 한해동안 공백기를 거쳐 74년 1월 출범한 인터내셔널 데이터 시스템코포레이션(IDsC)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IDsC의설립자 역시 IDC가 샤프데이타코리아로 전환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있던 이명진이었다. 이명진이 회사명칭을 굳이 IDsC로 한 것은 "노바"대리점으로서 기존 IDC의 브랜드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IDsC는당시 미 DG사가 직접 투자한 일본의 니혼미니컴퓨터(현 일본DG)와 계약을 맺고"노바01/1200"시리즈의 한국판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당시 니혼미니컴퓨터는DG와 합작으로 동남아지역에 공급할 "노바01/1200" 등을 일본내에서 직접생산하고 있었다.

IDsC는 출범이후 목포상고. 동광전기.건국대(이상 74년), 한국과학원. 홍능기계공업. 해양연구소. 선박연구소(이상 75년), 삼성전자(76년) 등에 "노바01/1200"을 비롯 "노바 840" "이클립스" 등 DG 제품을 잇따라 공급, 국내에 미니컴퓨터 기종 뿌리내리기의 최일선에 나섰다. DG의 미니컴퓨터는 79년말까지39대가 국내에 보급됐다.

IDsC는 77년 4월 당시 기업확장에 열을 올리던 동양정밀공업(OPC)그룹에흡수되면서 회사이름을 동양시스템산업(OSI)으로 개명했다가 OPC의 부도로 88년 기업으로서의 최후를 맞았다.

미 DEC가 63년 세계 최초로 발표한 미니컴퓨터 계열의 "PDP 8/E"는 72년 4월전기통신연구소가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PDP 8/E"는 그러나 같은해 도입했던 천공카드 용역업체 한국키보드를 비롯 74년말 인천제철.현대양행.강원산업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뚜렷한 공급회사 없이 오퍼상 등을 통해 공급됐다.

"PDP"시리즈와 후속 "VAX 11"을 전담 공급하게 되는 동양전산기술(OCE)이발족된 것은 75년 2월이다. OCE가 배출한 인물들을 면면을 살펴보면 이 회사가당시 국내 컴퓨터업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나를 가늠해 볼 수있다.

OCE의 중심 인물은 이윤기(전 삼보컴퓨터 및 엘렉스컴퓨터 대표).권순덕(한맥소프트웨어 대표).김영식(현 엘렉스컴퓨터 대표).김영한(하이테크마키팅연구소장).김천사(현 두산정보통신 대표).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이정희(현 삼보정보시스템 대표).윤부근(부륭시스템 대표).김주현(전 삼성전관상무).김의현(현 한국디지탈 상무) 등 이었다. 여기에 정수창(전 두산그룹회장).이용태(현 삼보컴퓨터 회장).구지회(전 가인시스템 대표) 등이 직간접으로 OCE를 지원하고 있었다.

OCE가 79년까지 국내에 보급한 "PDP"시리즈는 무려 58대로서 한국IBM의 75대에 이어 업계 전체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OCE의 실적은 창업한 75년부터4년여의 것이고 한국IBM의 것은 67년부터 12년에 걸친 실적이었다. 75년을전후한 주요 "PDP"고객들을 보면 동양시멘트.대한전선.영남대.반도상사.한양투자금융 등을 꼽을 수 있다.

OCE가 DEC의 국내총판으로 출범한 것은 당시 가장 인기있던 "PDP"시리즈의노하우를 습득, 이를 토대로 OEM방식의 컴퓨터를 생산해 보겠다는 야망에서였다. 출범당시 두산그룹 정수창 회장으로부터 창업자금을 지원받은 것도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OEM 생산과정은 제품의 가격 결정이 여의치 않아 결과적으로는 OCE의기업경영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말았다. 그 결과로 OCE는 77년 3월 두산그룹계열 동양맥주에 의해 지분의 50%가 매각된데 이어 79년 5월 같은 그룹내합동통신의 광고기획실부문과 통합, 오리콤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광고대행 사업본부와 전산 사업본부 등 2본부체제로 출범한 오리콤은 다시83년 DEC사업을 전담해온 전산 사업본부를 두산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 미니컴퓨터 3두마차 가운데 세번째인 "왕"은 73년 10월 김덕기(전 컴퓨터코리아 대표)가 김영한, 김성중(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 등과 설립한한국뉴콤에서 공급했다. 왕래버러토리즈는 한국뉴콤이 출범하기전 태영사라는 무역업체를 통해 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과 원자력연구소 등에 워드프로세서와 전자계산기(Calculator) 등을 공급해 왔다. 한국뉴콤이 출범하면서비로소 "왕2200A" 등 컴퓨터 기종이 국내에 들어왔는데 첫 고객은 75년의 대일유업과 금호실업이었다.

고객으로서 금호실업이 "왕"의 판권과 한국뉴콤 조직을 인수한 것은 75년6월이다. 이때부터 "왕"은 조직력과 자금력이 더해지면서 국내에서 인기가치솟아 79년말까지 30대를 공급, IBM.DEC.후지쯔.DG에 이어 국내에서 5번째로많은 기종 보급률을 기록하게 된다.

한편 컴퓨터기종 공급이 늘고 다양해지면서 전산소모품과 액세서리를 공급하는 회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기업들로는 조우니비지니스.삼양비지네스폼.광명돗판무어(이상 연속기록 전산용지), 한일카드.데이타미디어(이상 천공카드), 유일기업.삼애기업(이상 프린터리본), 바스콤(마그네틱테이프) 등이다. 이들이 컴퓨터 분야가 70년대 중반에 독자적인 산업분야로자리매김하는데 있어 적잖게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11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2) 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size:3jox9q8u]

70년대가 되어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한 축이 지난호에 언급했던 것처럼 하드웨어(HW) 판매였다면 또다른 축은 소프트웨어(SW) 용역이었다.

SW 용역은 크게 3가지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천공카드에 구멍을 뚫어주는 키펀치(Key Punch)용역.HW 도입기관의 업무개발 용역.외국산 패키지를도입해서 국내현실에 맞게 개량해 주는 업버전 용역 등이다.

키펀치 용역은 단순업무이긴 했지만 한때 정부의 수출장려 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업무프로그램 개발은 비교적 규모가 큰 기업에서 이루어 졌지만키펀치 용역처럼 활발하지는 못했다.

외국산 패키지를 업버전하는 일은 주로 외국계 대형 HW공급사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는 SW산업보다는 HW를 판매하기 위해 부대서비스 성격이 훨씬 더강했다. 한국IBM이 73년 대한항공에 "IBM 1130"을 공급하면서 68년 미본사가아메리카항공사와 공동 개발한 온라인 예약시스템 "PARS"를 도입, "KALCOSI"이라는 이름으로 현지화한 것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가운데 70년대 중반까지 가장 활발했고 우리나라 SW산업의 토대를 닦게해준 분야는 단연 키펀치 용역이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사실 키펀치 용역이 SW분야일 수는 없었다. 키펀치 용역이란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기억시키기 위해 종이카드나 종이테이프에 구멍을뚫고(Punching) 검공(Verifying)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작업과정에는극히 일부이기는 했지만 잘 훈련된 프로그래머가 필요했다. 따라서 초창기키펀치 용역은 당연히 SW분야에 포함됐고 또 SW산업을 대표하는 업종이기도했다.

컴퓨터 마인드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키펀치 용역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사뭇 긍정적이기까지 했다. 첨단 직종이라는 명분아래 사회적으로매우 전도유망한 직업으로 인식되는가 하면 키펀치 작업과정을 가르쳐 주는1~2개월 과정의 학원교습은 언제나 여성 수강생들로 붐볐다. KIST와 같은공공기관에서 개설한 수료과정은 70년대 말까지도 높은 인기를 누리며 젊은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천공카드시스템(Punch Card System)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60년대 초반부터이다. 그러나 당시는 용역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경제기획원 등에서 직접 직원을 고용, 인구센서스 처리와 같은 고유업무를처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말 컴퓨터 도입이 이뤄지고 한국전자계산소.KIST전자계산실.한국생산성본부 등이 키펀치요원 양성과 함께 공공기관 용역업무를 따내면서 키펀치 용역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키펀치 용역업을 표방하고 설립되거나 업종 전환한 기업현황을 보면 72년까지 10개이던 것이 73년에는 16개, 74년에는 23개사로 각각 늘어났다. 그러나이때 키펀치 용역회사들의 주 매출원은 내수보다는 미국과 일본지역에 대한수출이었다. 내수의 경우 74년까지 컴퓨터를 도입한 기관과 기업들을 중심으로 50여곳이 독자적인 PCS시설을 갖추고 자체업무를 처리해 오고 있었다.

국내 키펀치 용역에 의한 SW수출 1호는 69년 한국전자계산소(현 KCC)로서이를 시발로 KIST전자계산실(현 시스템공학연구소).서울컴퓨터센터.광운대전자계산소.나라교역(현 청호컴퓨터).한국보험전산.인터내셔널 컴퓨터리소스(ICR).동일컴퓨터센터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또 동일교역.동양비지네스 등 일본계 합작회사와 한국키보드 등 영국계 합작회사 등도 설립돼 키펀치 구멍수에 따라 달러의 양이 바뀌는 수출일선에 나섰었다.

키펀치 용역에 의한 SW수출 상황은 69년 한국전자계산소가 대일 수출을 개시한 이래 70년대 말까지 과학기술처 정보관리실이 매년 산출한 통계의 초기기록을 보면 69년 5천달러, 70년 2만달러, 71년 5만5천달러 등 소규모였다.
그런데 72년에는 전년대비 11배나 되는 60만5천달러에 이르고 73년에는 이의4배인 2백44만달러, 그리고 74년에는 4백68만달러 등으로 급증하고 있음을알 수 있다.

이처럼 수출외형이 급증하자 수출만능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던 정부는 상공부를 통해 키펀치 용역을 장려하려는 각종 시책을 펴게 된다. 대표적인 시책은덤핑수출에 의한 업계간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요원 양성 및 확보, 시장개척등의 공동 추진을 목적으로 72년 12월 한국전자계산용역수출조합을 결성케한 것 등이다.

정부는 이 조합을 통해 해외시장 정보를 수집하거나 영세 조합원 업체들을대상으로 내국신용장제도를 활용케 했으며 당시 융성하던 대형 수출상사와의계열화 등을 추진해 나가도록 유도했다.

키펀치 용역수출은 그러나 결코 바람직한 것은 못됐다. 주요 수출국인 미국과 일본이 한국에 키펀치 용역을 의뢰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단지 인건비가저렴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과기처의 기록을 토대로 72년 당시 각 3국의 키펀치 요원에 대한 시간당임금을 비교해 보면, 미국이 5.7달러.일본이 3.65달러였던 반면 한국은 겨우0.33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에 비해 17배, 일본에 비해서는 11배나 저렴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용역업체들은 자본력이 영세해서 PCS장비를 IBM이나 스페리랜드 등으로부터 임차해서 사용하던 터였다. 이를테면 PCS장비 임차에 대한 비용부담이수출원가의 50% 정도를 차지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악조건은 상공부의 수출장려 시책에도 불구, 전혀 개선되지 못했으며74년부터는 경쟁업체 증가와 채산성 악화로 중도 하차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76년 이후 살아남은 기업이나 기관은 붐이 일기전인 72년과 같은 10여개정도였다. 이들은 한국보험전산에서 이름을 바꾼 한국전산.주식회사로 전환한 한국전자계산.한국비지니스컨설턴트(KBC).KIST전산실.부녀복지회.광운대전자계산소 등 비교적 공공기관이나 기업규모가 단단한 곳들 뿐이었다.

한편 키펀치 용역수출이 SW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되고 있을 무렵, 일부기업과 공공기관들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SW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67년에 설립된 한국전자계산소를 비롯, KIST전자계산실.한국보험전산.서울컴퓨터센터 등이 70년대 초반 본격적인 SW개발을 주도한 회사들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은행컴퓨터 공동이용센터인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정부전자계산소등이 가세함으로써 초창기 우리나라 SW산업은 그런대로 위용을 갖춰나가기시작했다.

전문SW센터 운영이라는 취지로 시작된 SW개발은 그러나 수요가 늘 넘치는것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키펀치 용역과 같은 단순사업을 통해 회사를 유지해나가면서 외부로부터 업무프로그램 용역을 위탁받아 그 영역을 넓혀가는식이었다.

한국전자계산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IBM 직원이었던 이주용(현 KCC회장)이 미국에서의 유학경험과 IBM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설립했는데키펀치 용역에서부터 정부기관의 전산화 타당성과 설계용역.정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분석.우리나라 정보화마인드 조사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보기드문 용역들을 처리, 명성을 얻었다.

KCC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정부 및 주요 공공기관의 용역을 사실상 독과점했다. 특히 키펀치 용역수출이 벽에 부닥치면서 KCC는 재빠른 변신을 통해 일본 생산성본부와 일본 사학재단 등으로부터 특허관리업무.사학공제업무 등의 프로그램 개발을 위탁받아 74년까지 1백만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체신부의 전화요금 전산화 등 정부용역으로 노하우를 쌓아가던 KIST전자계산실도 72년께부터는 해외수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미기획단(USA/KPA)의 병참업무 전산화.미공보원(USIS)의 자료처리.미8군의 워게임(War Game)시뮬레이션SW 개발 등이 70년대 초반 KIST전산실의 대표적인 수출용역이었다.

서울컴퓨터센터는 68년 한국자동차보험.한국유리.경성방직.삼양식품 등 11개업체가 공동 출자,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2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출범해 출자회사들의 업무프로그램 개발을 전담했다.

또 이사장에 주요한(전 부흥부장관.상공부장관, 시인).감사에 전택■(전 YMCA 총무) 등 명망가들을 영입, 출범한 서울컴퓨터센터는 71년 IBM의 "IBM 360 40", 72년 컨트롤데이터의 "CDC 3150" 등 대형컴퓨터 등을 도입, 당시 SW센터로서는 가장 화려한 위용을 갖춰 나갔다.

서울컴퓨터센터의 센터 운영방식은 독특해 주주기업들의 용역처리와 전산요원 양성을 우선하되 주주기업들이 독자적인 전산시설과 처리능력이 생기면주식을 반납시키고 새로운 주주를 영입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컴퓨터센터는 화려한 장비규모와 달리 주주회사나 일반회사들의용역 의뢰 대부분이 단순 통계업무에 집중돼 컴퓨터 활용이나 센터 운영의수지타산 측면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같은 한계때문에 업계에서 가장 주목을받았던 서울컴퓨터센터는 75년말 소유주가 민경현(현 한국정보처리전문가협회 회장)에게 이양되면서 명칭도 서울컴퓨터학원(현 서울정보처리학원)으로바뀌게 됐다.

KCC.서울컴퓨터센터 등 보다는 늦게 출범했으면서 70년 중반부터 80년대에이어 90년대까지 줄기찬 성장을 거듭한 회사가 한국보험전산이다. 한국보험전산은 69년 은행들이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를 출범시키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대한생명 등 보험회사들이 이에 자극받아 전산화 경험이 많은 일본의 교에이(협영)보험을 끌어들여 한일합작으로 설립된 회사이다. 한국보험전산은 출자회사들의 성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내 보험산업의 전산화를 통해단기간에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초기 자본금 45만달러로 출범한 한국보험전산은 교에이보험의 전산화모델을도입, 보험업무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전표의 분류작업 등의 전산화에 착수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집결한 한국보험전산은 이어 72년 10월 상호를 현재의한국전산(KICO)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SW 외주개발과 시스템 대여사업에 나섰다.

특히 시스템 대여사업은 대여기관이 자체시설을 도입할때까지 업무처리를대행해 주는 방식이었다. KICO의 시스템 대여사업이 활성화되면서 과기처는73년 "분당 컴퓨터사용 단가표"라는 것을 정해 놓았는데 분당 직접처리(Foreground Job) 이용료는 6백70원, 이면처리(Background Job) 이용료는 4백원이었다.

70년 중반이후 KICO가 주력했던 외주용역은 삼성물산.신세계백화점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이었다.

KICO를 지휘하던 전상호(현 농심데이타시스템 사장)가 86년 설립된 삼성데이타시스템의 초대 사장에 영입된 것도 이같은 연유에서 였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18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3) 적응기 (8) 최초의 국산 컴퓨터 「세종1호」 [/size:3jox9q8u]

외국산 하드웨어 공급회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용역회사들의 잇따른 출범과함께 모양새를 갖춰 나가기 시작한 국내 컴퓨터업계가 비로 『우리 것』을만들고자 했던 노력을 보인 것은 72년부터이다.

물론 국산화에 대한 노력은 60년대 초반 李萬永(현 한양대 명예교수)의 진공관식 아널로그 계산기 제작(본란 5회 1월22일자)과 70년 KIST가 영문 라인프린터의 한글화(본란 6회 1월29일자)등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용환경을 지원하면서 완벽한 구성을 갖춘 컴퓨터 하드웨어 개발은 73년 2월에 완성된 미니컴퓨터 「세종1호」가 그 효시이다.

「세종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 01」을 개량해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디지틀 컴퓨터로 기록되고 있다.

「세종1호」의 개발과정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72년의 국내외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흥미롭다. 「세종1호」의 개발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애기다. 컴퓨터 기술이 이때부터 정치적 상황에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세종1호」는 지금은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된 삼성반도체통신의출범에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는 등 산업적 측면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세종1호」의 개발 프로젝트는 청와대 의해 「메모 콜(Memo Call)」이라는 암호명으로 72년 6월에 시작됐다. 이에 앞서 2개월 전인 72년 4월 당시청와대 통신기술처장이던 한 인사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측에 안병성에게 다음과 같은 기술적 검토 및 제품 개발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청와대의 주요 기관 간 전화통화에 내용에 대해 미국 등 외국의 정보기관이나 기타 외부로부터의 도청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고, 주요 요인들과 신속하게 통화할 수 있으며 통화 도중이라도 언제나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상태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핫라인용 사설전자교환기(PABX) 개발이 가능합니까?. 73년3월 이내에 개발이 가능하다면 연구개발비 댓가로 6천만원을 제공하겠소.』

청와대 측의 이같은 교환기제작 검토는 당시 李厚洛 중앙정보부장과 북한朴成哲 부수상의 극비 남북교환방문에 이은 7.4남북공동성명과 남북적십자예비회담 등 긴박했던 정치적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이를테면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간 초특급 핫라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KIST측은 2개월여 동안의 연구조사 끝에 청와대가 요구해온 PABX가 미국과소련 등에서도 극히 일부 고급기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시분할식 특수목적용 교환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 업계를 휩쓸던 미국 디지탈이큅먼트사(DEC)의 「PDP-11」시리즈나 DG사의 「노바 01」시리즈 등 미니급 컴퓨터를 PABX 시스템제어용으로 활용하면 청와대가 요구한 PABX의 사양을 못맞출 것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KIST측은 드디어 방식기기연구실(뒤에 전자공학부로 개칭)실장 安柄星(현ETRI기술역)을 팀장으로 하고 하드웨어의 디지털 부문에 余在興(현 한화전자정보통신 전무), 아널로그 부문에 李周炯(현 삼성전자 전무), 소프트웨어 부문에 천유식(현 ETRI 책임연구원)을 각 부문 책임자로 하는 「전자교환시스템팀」(내부적으로는 「노바팀」으로 불렸다고 함)을 구성, 청와대측과 「메모콜」개발 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했다.

「메모콜」프로젝트 실질적인 내용은 교환기를 자동으로 제어해 주는 컴퓨터시스템의 개발이었다. 따라서 제어용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필요했고 이에앞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하드웨어 플랫폼, 즉 미니급 정도의 컴퓨터가 필요했다. 당시 성능이 좋은 미니컴퓨터로는 「PDP 8/E」가 단연 으뜸이었는데 너무 인기가 좋은 나머지 고객의 주문에서부터 제품 인도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4∼5개월이었다. 물론 당시 청와대의 「힘」이라면 「PDP 8/E」몇 대쯤은 금방 들여올 수도 있었겠지만 청와대 측이 「메모콜」프로젝트가미국정보기관이나 다른 국내기관에 노출될 것을 꺼려한 나머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개발 시한이 73년 3월까지였으므로 KIST 측은 「PDP 8/E」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대신 당시 미국 DG가 일본에서 현지 생산하고있는 「노바 01」을 도입하기로 했다. KIST가 외무부에 협조를 구하는 형식을 취해 「노바 01」 3대가 주문 1주일 만에 방식기기연구실에 설치됐다.

개발된 제어용 소프트웨어들은 「노바 01」환경에서 모두 어셈블리어로 짜여졌다. 그 내용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송신자의 번호뿐 아니라 발신자 번호로도 전화를 걸 수 있는 기능.02.우선순위 통화권리(우선권)를 갖는 상위권 통화자(상급자 또는 긴급을요하는 통화자)가 하위권 통화자(하급자 또는 등급이 낮은 통화내용)의 회선을 제어 또는 일방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능.

3.우선권을 갖는 상위권가 하위권에 의해 불필요하게 호출되는 상황을 차단하기 위한 기능.

4.최우선권을 갖는 상위권통화자가 전국 어디서나 최대 50명까지 동시에호출, 음성회의(컨퍼런스 콜)을 할 수 있는 기능.

5.컨퍼런스콜 도중 특정인 하고만 통화가 필요할 경우 컨퍼런스 콜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재개할 수 있는 기능.

6.단축 다이얼기능

7.피호출자가 1대 이상의 전화를 가졌거나 다른 곳에 있을 경우 피호출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차례로 연결시켜 주는 기능.

사실 요즘 전자식 교환시스템 성능에 비교한다면 이같은 기능은 아무 것도아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하드웨어와 기술적 한계 등 여러가지 측면을고려할 때 최첨단이 아닐 수 없었다.「세종1호」의 개발과 제작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하드웨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됐다.

주요 7가지 기능을 구현하기 위한 소프프트웨어가 자체환경에서 개발됐지만 아이러니컬 하게도 「노바 01」은 교환제어를 위한 시분할 처리기능을 지원하지 못했다.

따라서 데이터를 생성하는 중앙스위치 및 모뎀에 접속된 지방 스위치장치를 시분할 방식에 의해 리얼타임으로 제어해 주는 새로운 하드웨어 사양이요구됐고 「세종1호」는 바로 이같은 목적에 의해 개발됐던 것이다.

「세종1호」는 「노바 01」의 사양과 기능을 그대로 복제한 일종의 호환컴퓨터였다. 처리용량도 12KW(킬로워드)로서 표준 사양의 「노바 01」기종과같았고 명령코드와 주소로 구성되는 인스트럭션 구조도 같았다. 그러나 「세종1호」는 당시 미국 인텔사가 개발해서 화제가 된 1KB짜리 D램을 메모리로사용, 처리속도를 크게 개선시켰고 기능을 모방은 했지만 설계는 완전히 독자적인 것이었다.

「세종1호」는 마침내 2백40회선을 지원하는 중앙스위치 및 지역스위치장치 연결됐고 KIST측은 이 PABX 시스템을 「K1T-CCSS」라고명명했다. 모든개발 과정은 청와대 측과 약속한 73년 3월까지 끝을 맺었다.

청와대 측은 그러나 「K1T-CCSS」가 납품되는 시점에서 시스템의 신뢰성에의문점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KIST측과의 계약파기를 선언해 버렸다. KIST 측은 또 시스템은 납품하되 6천만원의 돈은 지불할 수 없으며 대신 기업을 통해 이 제품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허가」만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업계는 기계식 교환기 생산에만 열을 올렸을 뿐 컴퓨터를이용한 첨단장비인 전자식교환시스템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KIST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개발능력을 높이 산 미국의 GTE社가 「K1-CCSS」의 상품화를 결정하고 나섰다. GTE는 KIST 측에 50만 달러를 제공하면서 「KI-CCSS」의 상용화 개발 프로젝트를 새로 발주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高健(현 서울대 교수), 金東圭(현 아주대 교수), 韓永哲(현 삼성전자 상무) 등이 소프트웨어 개발팀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75년 초에 개발된 것이 「KIST 500」이다. 「세종1호」가 일반에 알려지게 된 것도 사실은 KIST와 GTE의 공동프로젝트로 개발된「KIST 500」의 발표가 계기가 됐다.

GTE는 이 시스템과 「세종1호」 등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77년 2월 삼성그룹과 삼성GTE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삼성GTE가 바로 89년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된 삼성반도체통신이다.

삼성반도체통신은 「KIST 500」을 「GTK 500」 「센티넬500」 등으로 개량하면서 86년 교환기 4사에 의한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개발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세종1호」 역시 80년대 중후반 삼성반도체통신이 국내 처음으로독자모델로 개발한 「SSM」시리즈 수퍼 마이크로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로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종1」의 개발 들떠 있던 국내업계는 그로부터 몇 달 뒤인 95년9월 동양전산기술(OCE)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오리콤」이라는 한글배치터미널을 개발, 생산에 나섰다는 소식에 접하게 된다. 「오리콤」은 DEC으로부터 중앙처리장치(CPU)인 「PDP 11_05」, 데이터프로덕츠사로부터드럼프린터 장치, 다큐메이션사로부터 카드판독기 등을 공급받아 조립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당시 국내에 가장 많이 보급돼 있던 컨트롤데이터사(CDC)의 배치터미널 「200_UT」기능을 에뮬레이션해 주는 한글 소프트웨어를탑재한 것이었다. 이때 KIST 측에서 全州植(현 서울대 교수)등이 기술지원을 해주었다.

OCE는 76년부터 본격적으로 「오리콤」의 성공과 대량생산에 나서, 본격 공급에 나섰으나 가격경쟁력에서 다른 제품에 뒤져 큰 성공을 거두지못했다.

OCE의 노력은 비록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외국 부품들을 들여와조립생산 해본 다음 기술이 축적되면 자체 모델을 개발해 보겠다는 국산화 의지의 발로였다는 점에서 지금도 업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2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4) 적응기 (9) 한국IBM의 터잡기[/size:3jox9q8u]

70년대 과학기술처가 펴낸 컴퓨터산업 편람을 살펴보면 71년부터 75년 사이 우리나라 컴퓨터 보급대수는 미니급과 메인프레인급을 합쳐 모두 98대에이른다. 이 가운데 한국IBM이 공급한 대수는 41대나 된다.한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40%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한국IBM이 공급한 기종은 「시스템(S)/360」과 「시스템(S)/370」등 대부분 메인프레임급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디지탈이큅먼트(DEC), 데이터제너럴(DG), 왕래버러토리즈 등 미니컴퓨터 3총사가 30여대를 공급했는데도입가격으로 따지면 미니급에 비해 메인프레임급이 10∼1백배나 비쌌으니그야말로 한국IBM의 시대가 아닐 수 없었다.

IBM관계자들은 미국IBM이나 한국IBM 모두 이 시기가 기업적 사활에 매우중요한 분기점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60년대 말까지 몇 안되던 컴퓨터회사들이 70년대 초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컴퓨터 기종도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특화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 주된 컴퓨터 고객층인 기업에서는 세계적으로 생산성 향상이라는 일종의 기업재구축 운동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다. 따라서 기업생력화나 인력 재배치 등과 관련, 컴퓨터 도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기업의 이같은 움직임은 70년도부터 불어닥친 선진국들의 경기침체, 중동전쟁으로 야기된 원유가 폭등에 따른 자구책이었다. 기업은 이 자구책을 강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컴퓨터 도입을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공급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이 시기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IBM이 이같은 격동기를 기업중흥에 얼마나 유효적절하게 이용했는가는 여러가지 증빙 자료들이 많다. 73년 IBM본사의 매출은 벌써 1백억 달러, 직원은 25만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한국IBM의 성장은 이보다 더 비약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의 자본금 추이를 보면 70년 2억7천3백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75년에는 무려 7.6배가 증가한 20억8천만원에 이른다. 또 매출액은70년 1억8천만원이던 것이 75년에는 15배가 증가한 27억5천만원에 달하고 있다.(당시 쌀 1가마에 1만5천원).

한국IBM의 75년도 매출액 27억5천만원은 당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총규모56억원(추정치, 당시 컴퓨터 관련업체 매출 합산치)의 50%를 넘어서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을 떠받치고 있던 컴퓨터 기종은 메인프레임급인 「S/360」 「S/370」과 「IBM 1130」등 3개 기종이었다.한국IBM의 시장점유율이40%가 넘었으니 이 3개 기종은 70년 중반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환경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가운데 「S/360」은 데이터의 연산과 기억장치에 논리회로를 사용하기시작한 제3세대 컴퓨터의 원조격으로 한국IBM에게는 컴퓨터 회사로서 영업적기틀을 마련해준 기종이다. 「S/360」은 특히 세계 최초로 고체논리회로 반도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처음으로 표준 아키텍처 기술을 사용한 컴퓨터로기록되고 있다.

중심이 되는 표준 아키텍처를 기본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변형 모델을 만들어 모델간 소프웨어 호환성을 강조한 「S/360」시리즈는 모두 13개모델이 발표됐다.

「S/360」은 68년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처음 설치된 이후 락희(현LG화학), 한국전력, 연합철강, 대한항공 등을 포함 모두 10대가 국내 공급된 바 있다.

「S/360」 후속인 「S/370」시리즈는 71년말 첫 모델 「S/370-135」 발표이후 77년까지 7개 계열 14개 모델이 발표됐다.「S/370」은 단일체 집적회로(IC) 메모리 반도체를 채용한 3세대 제2기 컴퓨터로서 「S/360」과는 개념이나 성능 면에서 달랐다. 가상 기억장치 개념을 도입,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실제 기억장치보다 훨씬 큰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물리적메모리 한계를 극복한 것도 이 기종의 특징이었다.

「S/370」은 72년 국방부를 필두로 75년 말까지 조선공사, 경제기획원, 금성사 등에 19대가 공급됐다. 「S/370」은 또 81년까지 10년 동안 한국IBM의주력 공급 기종으로 모두 59대가 팔려 나가는 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IBM 1130」은 2세대 「IBM 1401」을 잇는 후속 중형급 컴퓨터로서 과학기술 계산에 강점을 갖고 있어 특히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도입해서 사용했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69년 숭실대를 시작으로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 고려대, 인하대 등에 보급됐다. 농업진흥공사, 대한항공, 호남정유 등도 이 기종을 도입, 사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71년부터 75년까지 한국IBM의 역할이 돋보이고 있는 것은 이 기간 동안 이회사가 컴퓨터를 공급한 기관이나 기업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간동안은 특히 유신정권이 탄생하고 기반을 닦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정부정책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부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업과 기관의 컴퓨터도입 붐은 바로 이같은 흐름에 민감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만은 할 수 없겠지만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의 고객은 크게 군, 제조업, 교육기관 등 3분야로 대별되고 있다. 특히 군의 경우 69년의육군본부에 「S/360」을 공급한 것을 비롯, 72년과 73년 국방부와 공군본부에 잇따라 「S/370」을 공급했고 74년과 75년에는 해군본부에 각각 「S/3」과 「S/370」 등을 납품, 한국IBM은 3군과 국방부를 함께 휩쓰는 전무후무한실적을 올리도 했다.

교육기관은 주로 대학으로서 서울대와 고려대를 비롯, 전자계산학과 명문들인 숭실대, 동국대, 인하대, 중앙대 등이 포함돼 있다.

제조업은 이 시기에 정부의 부흥책이 집중되던 전자, 석유, 화학, 철강, 조선 등 분야로서 한국IBM은 연합철강, 호남정유, 대한조선공사, 현대중공업, 한국중공업, 금성사, 럭키, 경인에너지, 동아제약, 제일모직 등 당대에 최고로 잘 나가던 기업과 정부투자 기업들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3대 고객 분야 가운데 한국IBM이 가장 신경을 썼던 곳은 역시 군의 총본부인 국방부였다. 국내 처음으로 「S/370」을 도입한 국방부의 전산화는 정부기관 중에서는 경제기획원에 이어 2번째였지만 처리업무의 성격이나 그 파급효과를 따지면 프로젝트 규모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실제 국방부 전산화는 훗날 정부기관들의 견학장소로 빈번하게 이용됐을뿐 아니라 육해공군, 농수산부, 국민은행, 재무부, 내부무, 치안본부 등 다른 기관들의 컴퓨터 도입기종 결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IBM으로서도국내에서 「S/370」시대를 여는 시금석이 됐다.

한국IBM은 당시 1백여명의 직원 전원이 모두 국방부 프로젝트에 매달리다시피 했고 개발자들은 프로그램 호환성 테스트를 위해 일본IBM을 수없이 오고갔다. 92년에 편찬된 한국IBM의 社史 「한국아이비엠 25년 발자취」에는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한 도막의 에피소드로 소개돼 있다.

『유재흥 국방부 장관(당시)과 각군 참모총장이 참석하게 돼 있는 72년 12월18일 국방부 전산화 개통식을 하루 앞둔 17일, 「S/370」의 CPU보드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한국IBM의 라스무센 사장(당시, 미국인) 은 그날이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일본IBM에 날아가해당부품을 구입, 교체함으로써…』

한편 「S/360」과 「S/370」이라는 연타석 홈런에 힘입은 한국IBM은 73년, 창업 6년 만에 처음으로 3천여만원의 흑자를 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흑자기조를 기반으로 한국IBM은 73년12월 제4대 사장에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직원 崔垠拓(68년 입사)을 처음으로 대표이사 사장에 내부 승진발령하게된다.

한국인을 대표이사로 선임한 것은 다국적 기업의 현지화 일환이었다고 볼수 있는데 이에 걸맞게 최은탁은 취임 첫해 8억8천만원에 불과하던 한국IBM의 매출액을 6년 만에 1백억원대로 끌어올렸다. 한국IBM은 또 당시 『현지국가사회에 대한 기여가 영업 못지않게 중요한 경영목표이며 이를 도외시한다국적기업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기업시민 정신을 발표, 화제를 모으기도했다.

이같은 기업시민 정신에 따라 한국IBM은 국내진출 외국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학술지원 사업을 펼쳤는데 그 내용은 국내 유수의 젊은 과학자를선발, 세계 최첨단 IBM왓슨연구소를 1년간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완슨연구소 연수프로그램 수혜자들을 보면 김길찰, 김성철, 좌경룡, 안광덕, 정원량, 김진형(이상 KAIST교수), 김성운(고대 교수), 이범천(큐닉스컴퓨터 회장), 이기준, 고건, 이석호, 최양희(이상 서울대 교수), 박승규(아주대 교수)등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4.04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5) 도약기 (1) 대학의 고급인력 양성[/size:3jox9q8u]

지금도 그렇지만 70년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환경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은 역시 고급 인력의 부족이었다.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75년말 우리나라 컴퓨터 설치대수는 1백22대로 여기에 필요한 기술 및 운영 요원은 6천2백여명이었으나 약 4천3백여명만이 확보돼 있어 인력 충원율은 70%를 밑돌고 있었다.(76과학기술편람)
과기처는 76년 연두 업무보고에서 컴퓨터 요원을 포함한 고급 기술요원의중장기 양성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등 인력수급에 매우 고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0년 이후 정부의 장려로 기업 등에 컴퓨터 도입이 본격적으로 확대됐으나 시스템 운영이나 관리 요원 등의 확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76년 당시 국내에 확보된 4천3백여명의 컴퓨터 기술 및 운영요원 분포를보면 석박사급과 최정예 전문기술관리 요원 50여명, 전공 및 관련 전공 학사급 2백여명 등 모두 2백50여명이 고급두되군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박사급은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0여명과 국내에서 경영정보시스템 등을 전공한 국내파 20여명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주로 KIST등 연구용역기관에 포진하고 있었다.

2백여명의 학사급 고급두뇌로는 76년도를 전후해서 첫 졸업생을 내기 시작한 국내 5개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출신 1백여명과 수학, 통계, 전자, 통신등 관련학과 전공 출신 1백여명 등이다. 학사급은 주로 정부기관, 기업체 전산실과 KIST 등 용역연구기관, IBM, 후지쓰, 한국스페리(현 유니시스),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 등 컴퓨터 공급회사 등에서 시스템엔지니어(SE)고객지원요원(CE), 전문 프로그래머 등으로 현업의 핵심부서에 배치돼 있었다.

고급요원을 제외한 4천여명 가운데는 KIST, 정부전자계산소(GCC)를 비롯, 서울컴퓨터센터, 한국전자계산 등 용역기관들이 소정의 단기 교육을 양성된요원들이 많았다. 또 한국 IBM, 한국스페리 등 컴퓨터 회사들이 컴퓨터 도입기관의 직원들을 재교육시켜 배출한 요원들도 부지기 수였다. 도입기관의 직원 재교육은 컴퓨터의 간단한 조작이나 감시인력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컴퓨터를 가장 많이 판매했던 한국IBM의 경우 76년 말까지재교육 실적은 연인원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한 사람이 여러 과정을 수강한 경우가 대부분 이었으므로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음)

4천여명 요원 가운데는 또 1천5백여명 정도가 고졸 출신 카드천공요원(키펀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6년말 현재 국내 카드천공기 및 검공기도입실적은 1천2백여대에 이름)

단기간의 재교육과 재배치를 통해 양성된 인력이나 단순직인 키펀처들을기술 및 운영요원에 분류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당시의 컴퓨터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직원 재교육이나 키펀처의 양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못됐다. 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인력 충원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키펀처들은 75년을 기점으로 키펀치용역 수출업계가 사양세를 걸으면서 오히려 줄여 나가야 할 판이었다. 당시 정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76년말 시점에서 부족한 컴퓨터 기술 및 운영요원 1천9백여명의 대부분도기술관리요원, SE, CE, 프로그래머 등 장기간 교육에 의해서만 양성되는 고급인력일 터였다. 그런데 이같은 전문 인력부족 현상은 정부 차원의 근본적대책 마련 없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당시로서 4년제 정규대학 컴퓨터관련 학과 전공 전문인력 부족현상은 컴퓨터 도입확대와 정보화 시대를 앞두고 정부가 해결해야 줘야 할 최우선 과제의 하나이기도 했다.

76년 한해 우리나라에서 배출된 4년제 정규대학 전자계산학과 졸업생은 모두 1백1명이었다. 이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광운대, 중앙대, 동국대, 홍익대등 4개 대학과 3회째 졸업생을 낸 숭실대 등 5개 대학 5개 학과를 합친 숫자였다. 1백명 이상의 컴퓨터전공 학사가 배출된 것은 현실적인 고급인력 부족을 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던데정부의 공급인력 양성 정책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일대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4년제 과정의 컴퓨터관련 학과가 설치된 것은 70년초 숭실대(당시 숭전대)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숭실대는 70년 3월 金淇龍 교수를 통해 당시 미국 대학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른바 「커리큘럼69」를 토대로 전자계산학과를 설치, 30여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가 첫 신입생을 받아 들이는 시점인 70년초 컴퓨터도입의 급증으로 1개과 만으로는 기술인력 확보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해진상황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 도입을 심의하는 과기처의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에 접수된자료대로라면 70년 이후 컴퓨터 도입은 연평균 25% 이상씩 기하급수로 증가할 전망이었다. 그러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가 74년에 배출하게 될 첫 졸업생은 군입대 등을 제외하면 많아야 20명 선이었다.

이같은 예측에 따라 과기처와 문교부는 신입생도 받기전 다른 대학들로 하여금 전자계산학과의 추가신설을 협의하게 된 것이다. 이 협의에 의해 72년3월 광운대(당시 광운공과대학), 중앙대, 동국대, 홍익대 등 4개 대학이 동시에 전자계산학과를 신설하게 됐던 것이다.

77학번 신입생을 선발하기 직전인 76년말 5개의 대학의 전자계산학과현황을 살펴보면 60년대말 도입기, 70년대 중반까지 적응기를 거쳐 비로소 도약기로 접어든 우리나라 컴퓨터 환경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과기처 자료에 따르면 74년도 숭실대 1회 졸업생 22명부터 76년도 5개대학1회 졸업생을 모두 포함한 4년제 전자계산학과 출신 전문 졸업생은 1백55명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재미있는 것은 76년 현재 졸업생 1백55명 가운데 군입대를 포함한 취업률이 83.2%(1백29명)에 이르러 당시 4년제 일반학과의 졸업생 평균 취업률 70%대를 상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관별 취업 현황을 보면 정부기관(25), 금융기관(9), 컴퓨터회사(10), 연구소(5), 기업체(26), 교육기관(12), 대학원 진학(9), 군입대(33)등이었다.
나머지 미취업자 26명은 결혼(여학생)이나 타직종 취업 등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전자계산학과 재학생 및 졸업생들로부터 인긱 높았던 취직 기관으로는KIST, 한국은행, 5개 대학부설 전자계산소, 포항제철, 육군전산소, 한국IBM, 쌍용, 파콤코리아(현 한국후지쓰), 서울시청, 경제기획원 통계국 등이었던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각 대학의 4개년 학과 과정은 앞서 언급한 미국의 「커리큘럼xx」을 따른것이었는데 1학년은 교양과목 위주였고 2학년은 코볼과 포트란 등 프로그램언어, 계산기 실습, 어셈블리어, 회로이론, 선형대수 등, 3학년은 수치해석, 데이터 구조, 계산기 구조, 운용체제(OS), 계산기실습, 확률과 통계, 계산기언어론, 계산기 회로, 회로망 등, 4학년은 경영정보시스템(MIS), PL/1, 시뮬레이션, 아날로그/하이브리드, 운용과학(OR), 정보이론 등이다. 현재의 전자계산학과 과정과 비교해서 내용상으론 달라졌겠지만 과목상으로는 크게 변화된 것은 없다.

당시 대학 교수진들로는 광운대의 경우 주임교수였던 沈在洪을 필두로 李圭鎔, 金慶泰 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앙대에는 주임교수 李京煥을 비롯 金永燦 등이, 홍익대에는 70년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창설 주역이던 金淇龍을위시하여 주임교수 朴長春, 元裕鉉 등이 있었다. 또 동국대에는 주임교수 安思明을 비롯 洪永植, 朴忠吉, 丁奎連 등이, 숭실대에는 주임교수 李哲熙를위시하여 宋厚奉, 辛洪哲과 미국인 프린스 등이 재직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실습은 부설 전자계산소가 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각대학의전자계산소들은 학사와 및 행정업무 처리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도록 문을 개방해 놓고 있었다.

5개 대학 전자계산소들이 보유하고 있던 장비들 가운데는 컨트롤데이터의「CDC 3100」 을 보유하고 있던 홍익대, 후지쓰의 「파콤230-15」를 보유하고 있던 광운대가 용량면에서 다른 대학들을 앞섰다. 중앙대, 동국대, 숭실대가 보유하고 있던 기종은 IBM의 「IBM 1130」이었다. 그러나 이들 5개 대학 전자계산소가 보유하고 있던 기종들은 세대 구분상으로 본다면 60년대 초반에 나온 2세대 중형급 컴퓨터들이었다.

기업이나 기관들에서는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IBM의 「시스템/360」과 「시스템/370」을 비롯 컨트롤데이터의 「사이버72」 등 대형에서 초대형급 3세대 기종 도입이 한창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학의 컴퓨터 시설은 당시로서도 상당히 낙후된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편 4년제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신설은 79년까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등이 가세 15개교로 늘었고 이때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는 해인 83년에는졸업생 규모가 6백명 선을 넘게 된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4.11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6) 도약기 (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size:3jox9q8u]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공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육성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의지를 보인 것은 69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부터이다.

사실 상공부는 67년 개원한 과학기술처가 처음부터 컴퓨터를 포함한 정보산업 정책을 일괄하는 바람에 한동안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물론 상공부의컴퓨터산업에 대한 본격 개입은 전자공업진흥법이 시대와 상황논리에 맞게개정되고 처음으로 정보기기과라는 독립기구가 증편된 81년부터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이미 69년의 전자공업진흥법 제정 때부터 상공부는 컴퓨터산업 정책을 직접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만은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실제 7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전자공업계에 컴퓨터 하드웨어 국산화라는 거센 열풍을 몰아오는 실질적 계기와 분위기 조성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은 81년 법개정시 『전자공업의 발전이 앞으로는 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을 몰아왔고 이어서 「전자계산조직(컴퓨터일반)을 전자공업의 범위안에 포함한다」는 것을 법조문에 명확하게 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상공부가 국내 정보산업 정책 주도권 경쟁의 전면에 나설 수있도록 해 줬던 셈이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사실 전자산업을 통해 경제부흥을 꾀하자는 정부 의지가강하게 담겨 있었다. 정부는 당시 59년 금성사가 진공관식 라디오를 조립 생산한 이후 싹이 보이기 시작한 우리나라 전자공업에 획기적 전환기를 마련하기 위헤 이 법을 제정한다고 그 배경을 발표하기도 했다.

전문 16조와 부칙으로 된 전자공업진흥법에 의해 같은 해인 69년 탄생된것이 바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이라는 중장기 전자제품 개발 계획이다. 상공부가 마련한 이 계획은 69년부터 71년까지 1단계, 72년부터 76년까지 2단계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상공부로 하여금 80년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국내 정보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단초가 되리라는 것을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8개년 계획 가운데 1단계에서는 기본전자부품(컨덴서 등 17개 품목), 반도체(집적회로 등 10개 품목), 민생용 전자기기(TV 등 9개 품목), 산업용전자기기(특수전화기 등 10개 품목), 전기측정기기(오실로스코프등 9개 품목), 전자재료(세라믹소재 등 7개 품목)등 7개 분야 62개 품목의개발과제들만 포함돼 있었다.

2단계에서는 1단계 7개 분야에서 제외된 전자복사기 등 27개 품목과 신규로 전자계산기와 군사용 전자기기 등 2개 분야 6개 품목이 세로 추가된다.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2단계에서 추가된 전자계산기 분야인데 여기에는 탁상용 전자계산기, 중형전자계산기, 카드천공기(PCS), 자동 프로그램공작기(수치제어공작기), 세밀절단기 등이 포함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상공부는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의 2단계에서 전자산업 개발 체제의확립을 위한 기본 목표를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양산체제의 확립, 생산의 합리화 등 3가지로 정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상공부는 특히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부문을 산학연의 연결고리로 삼는다는 방침 아래 8개년 계획이 마무리될 즈음인 76년 12월 30일 국내 최초의 컴퓨터와 반도체 전문 출연연구소를출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의 전신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다.

76년 12월 6일 발표된 정부 계획에 따르면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설립은정부출연 41억원, 민간출연 10억원, IBRD차관 1천1백만 달러 등 모두 1백6억원의 거금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또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이 연구소 출범일정이 포함돼 있었던 터라 당시 경제정책 최고 기구였던 무역진흥확대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그 전모가 보고됐을 만큼 비중이 컸었다.
구체적 게획에는 구미공업단지에 부지 3만평을 매입해서 78년 6월까지 컴퓨터 및 반도체 전문 대단위 기술연구용 단지를 건설한다는 것도 포함 돼 있었다.

연구소의 주요 사업은 전자계산기 부문에서 상용제품 제작 및 국산화추진, 관련공장의 운영, 기술훈련, 기술지원 등이었고 반도체 부문에서는 반도체의 설계, 제조, 공정 및 양산 기술의 국산화 추진 등이었다.

출범과 함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초대 이사장에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이던 朴勝璨(당시 금성사 대표이사, 작고)이 임명됐다. 이는 한국전자공업회장이 당연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이사장을 겸한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초대 연구소장은 KIST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韓相準(현 한양대명예총장)이 내정됐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 기본 운영 방침은 그동안 과기처 산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중심으로 진행돼온 컴퓨터와 반도체부문의 연구개발 활동을 한곳에 집중시킨다는 것이었다. 즉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정부 출연기관으로 전환시켜 상공부 통제하에 놓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출범은 상공부가 우리나라 정보산업정책 결정의전면에 나설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해준 셈이다.

76년말 출범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실제 79년 구미 연구단지가 완공될때까지 서울 사당동과 역삼동 임시 사무실을 전전하면서도 16비트 및 32비트초소형(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한 유닉스 운영체제 이식기술, 8비트 및 16비트마이크로컴퓨터 개발에 착수하는 등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특히 컴퓨터하드웨어(탁상용 전자계산기 또는 중형 전자계산기)국산화에 대단한 의지와 열의를 보였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 성장률은 매년고무줄 늘어나듯 신장되고 있었는데 예컨대 주력 수출 품목이던 흑백TV는 69년 이래 연 평균

컴퓨터 하드웨어의 국산화 추진 분위기는 바로 흑백TV의 신화를 재장조하자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컴퓨터 국산화를 사실상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李龍兌(현 삼보컴퓨터 회장)이다.

70년 미국에서 귀국한 李龍兌는 76년 KIST 컴퓨터국산화 연구실장으로 재직하다 78년부터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가 이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 국내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 「HAN-8」이다. 李龍兌는당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출범 배경과 컴퓨터 국산화 상황과 관련,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연간 40∼50%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80년대에는 영국을 앞질러 세계5위에 들어야 한다고…중략…그렇게 하려면전자공업이 선진화돼야 하고 따라서 컴퓨터와 반도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민간회사에서는 여건이 미성숙…중략…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민간회사에 어떻게 도움을 줄거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예컨대 생산준비, 실험준비, 개발시설을 완비하고 필요한 기술인력을 모두 준비해 놓으면민간회사에서 초기 투자없이 컴퓨터산업에 막바로 뛰어들 수 있지 않은가…
중략…바로 그 역할을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경영과컴퓨터 81년7월호)

이어 그는 「HAN-8」의 개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어 당시 상공부의 입장이 무엇이었는가를 대변해주고 있다.

『「HAN-8」은 16비트인 「HAN-16」을 위한 준비단계 작품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78년경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가 이미 시장에 나왔고 82년경에는 16비트, 86년경에는 32비트제품이 완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당면목표는 16비트 제품을 선진국과 동시에 세계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경영과컴퓨터 81년7월호)

사실 상공부가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한국전자기술연구소로 개편하려했던 것은 당시 컴퓨터 국산화와 생산에 매우 적극적이던 업계 분위기가 한몫을 거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금성전기, 동양전산기술(현 두산정보통신 전신), 고려시스템산업(92년 폐업) 등이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삼성전자는 미국 휴렛팩커드와 제휴하여 OEM방식의 미니 컴퓨터생산을 추진하고 있었고 금성전기는 일본 NEC의 미니컴퓨터 생산을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또 동양전산은 이미 75년경부터 미국 DEC와 합작생산 체제에 돌입해 있었고 고려시스템, 금호실업, 금성통신, 쌍용양회, 선경 등도외국회사와 기술제휴선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한편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출범과 때를 같이하여 또 하나의 연구소가 설립되는데 바로 과기처 산하의 KIST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77년에 한국통신기술연구소로, 다시 81년에 한국전기통신연구소로 2번에 걸쳐 명칭을 변경하며 우리나라 통신기술 개발지원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외에 비슷한 기관으로 KIST 전산개발센터라는 곳이 하나 더 있었다. 과거 KIST 전자계산소가 확대 개편된전산개발센터는 비록 KIST의 부설 용역기관이었지만 연구개발 성격도 강해당시 척박했던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개발지원 부문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정보산업 영역은 컴퓨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통신 등 3대 분야로 짜여져 있었고 각 분야 마다에는 개발지원을 담당하는 연구소가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이시기의 움직임을 해당정부 부처의 역할로 풀이해 본다면 과기처는 상공부에 일정 부분 역할을 자의반타의반으로 넘겨준 것이고 상공부는 「전자공업 입국」 또는 「수출 지상주의」에 정보산업을 포함시켜보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4.1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7) 도약기 (3) 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size:3jox9q8u]

국내 컴퓨터역사에서 일본계 기업의 첫 진출기록은 후지쯔가 갖고 있다. 74년 2월 후지쯔는 서울 종로 소재 합통통신회관 빌딩(현 국세청)에 1백%(1억9천8백만원) 단독 출자한 현지법인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한다.

화콤코리아의 출범은 이어 히다치와 일본전기(NEC)의 한국 진출을 불렀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IBM, 스페리랜드, 컨트롤데이터(CDC), 디지탈이큅먼트(DEC) 등 미국계가 휩쓸던 당시 국내 컴퓨터업계에 후지쯔 중심의 일본계 견제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점이다. 또 당시 단순 키펀치용역에머물던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 수준을 운용체제(OS)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계기도 제공했다. 실제 출범 3년 만인 77년 화콤코리아는 무려 55만 달러어치의 OS를 개발, 일본에 수출하게 된다.

화콤코리아가 출범한 74년은 우리나라 컴퓨터역사가 도입기와 적응기 등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이제 막 도약기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이미 60년대 말진출한 IBM, CDC, 스페리랜드와 달리 70년대 중반에서야 비로소 한국 진출을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비화가 있다. 화콤코리아가 당시 우리 정부의 외자도입법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고 출범하게 되는 과정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화콤코리아를 출범시키기 전까지 후지쯔는 한국내 영업을 일본본사가 직접챙겼다.

후지쯔는 67년에 국내에 「파콤222」기종을 첫 판매한 이후 화콤코리아를출범시킬 때까지 11대의 컴퓨터를 한국에 공급했거나 계약한 상태였는데 모두 일본 본사의 직접 영업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이미 7년 전에 현지법인을출범시킨 IBM의 22대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후지쯔가 한국 진출을 미룬 것은 일본 본사 자체가 컴퓨터 사업을 시작한 지얼마되지 않아 현지법인 출자 여력이 없었던 데다 한국내 컴퓨터 마인드도신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판매된 11대 가운데 한양대에공급된 「파콤230-10」 등 7대 이상이 이른바 대일청구권 자금에 의해 들여온 것이었다. 후지쯔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판촉활동 없이도 한국에서의 영업실적이 좋았다는 얘기다.

실제 후지쯔가 한국에 직판했던 11대 가운데 정부부처 및 공공기관 5대, 육사를 포함한 대학 5대, 포항제철 1대 등으로 민간기업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후지쯔가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했다는 점이다. 포항제철은 화콤코리아가 출범하기 7개월 전인 73년7월에 공급계약을체결하고 출범 후인 74년 4월 「파콤230-25」기종이 설치된 곳이다.

94년 펴낸 한국후지쯔 사사 「한국후지쯔20년사」에는 『화콤코리아 설립을 위한 중요한 분수령은 73년 포항제철 전산설비의 수주 성공이었다』고 적고 있다. 초창기 화콤코리아에 재직했던 Q씨는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하지 못했다면 후지쯔의 한국진출은 최소한 80년대 이후로 연기됐을 것』이라고 들려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지쯔는 73년 초부터 국내 컴퓨터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포항제철 전산화프로젝트 수주전에서 IBM, CDC, 스페리랜드(유니백) 등미국계 빅3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당시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의 최종 낙점을받는데 성공한다. 객관적 상황으로는 후지쯔가 낙점받을 이유가 거의 없었다. 빅3는 모두 60년대 말에 한국에 현지법인을 설립, 본격적인 영업망 및사후지원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기종의 지명도에서도 후지쯔 「파콤」을 앞서고 있었기 떠문이다.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후지쯔는 한달 만인 73년 8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를 제출, 현지법인 설립작업에 나서게 된다. 기종결정 후 곧 바로 투자인가 신청서를 낸 것은 67년 IBM이 국내 진출할 때와 비숫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IBM은 경제기획원에 「IBM 1401」을 공급하면서 현지법인 한국IBM을 설립, 사후지원을 책임진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물론 포항제철 입장에서도 「파콤」을 택한 분명한 이유는 있었다. 70년대초반을 전후한 포항제철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70년 부터 73년 7월까지 이어진 포항제철의 제1기 설비공사에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박태준은 모든 모델을 세계 제1의 제철소인 신일본제철소에서 찾았다. 박태준은 또 담당자들에세 2기, 3기, 4기 설비공사와 밀접한 관계가있는 일관공정체계의 전산화 모델 역시 신일본제철소의 사례를 따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신일본제철소가 도입한 전산시스템은 바로 후지쯔의 「파콤」기종이었다. 이 때문에 후지쯔는 신일본제철소 전산화 경험을 토대로 포항제철의공장설비 설계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어느 정도 영행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또 포항제철 설립과정을 자문, 73년 우리 정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던 아카자와(赤澤璋一)씨가 기종 결정 당시 후지쯔 본사의 전무로 재직중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포항제철의 기종결정과 후지쯔의 현지법인 설립에 계기가 됐다는 구체적 증거는 없다.

73년 8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던 후지쯔가 화콤코리아의 설립인가를 받아낸 것은 이로부터 5개월 만인 74년 1월이다. 신청서 제출로부터 인가가 날 때까지의 소요기간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약간 긴편에 속했다.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IBM이나 CDC의 경우 2~3개월 가량이 소요됐다는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일이 많이 소요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후지쯔는 법적으로는 화콤코리아의 출범이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만들었다.

화콤코리아의 출범인가가 늦어진 것은 후지쯔가 제출한 투자인가 신청서가우리 정부의 외자도입법에 배치되는 내용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자법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60년대 후반, 외국인 투자를 적극유치하기 위해 제정됐다가 72년 이후 일본기업들의 진출이 급증하자 73년 3월 개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개정된 외자법은 외국인 투자 대상을 선별할수 있도록 하고 외국인 출자비율도 5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다. 즉 합작법인 형태만 투자를 인가해 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후지쯔는 처음부터 이 법을 어길 요량이었던지 한국측 합작파트너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대신 『「파콤」용 OS를 개발, 제조, 수출하고 기술을 한국에 이전 한다』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 투자사업 내용을 제안했다.

우리 정부가 이같은 단독출자 신청을 받아들인 것은 외자법상의 분명한 「예외조치」 였다. 「한국후지쯔20년사」에서는 당시 이같은 예외조치의 수용을 위해 일본 후지쯔 관계자들이 재무부, 상공부, 문교부, 과기처 등 관련부처를 직접 방문, 「양해」를 얻어 마침내 74년 1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조건부 투자인가를 얻어냈다고 적고 있다.

당시 경제기획원의 화콤코리아에 대한 투자인가는 「파콤」용 OS를 개발해서 전량 후지쯔로 수출할 것과 회사 설립후 3년 이내에 30%, 5년 이내 50%의주식 또는 지분을 한국인에 양도한다는 조건부였다. 그러나 화콤코리아는 이후 여러번의 자본금 증자 과정이 있었지만 조건부를 이행하지 않았고 한국후지쯔로 개명한 현재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화콤코리아의 초창기 멤버 가운데 황칠봉(효성데이터시스템 사장), 김용대(선경정보시스템 전무), 이의일(세중컴퓨터시스템즈 사장), 송재형(타스크포스시스템 사장)등이 아직도 현직에서 활동중이다.

한편 화콤코리아를 출범시킨 후 후지쯔는 한국에서 미국계 기업들 못지않은 왕성한 사업을 벌이게 된다. 사업 부문은 크게 「파콤」시리즈의 영업(하드웨어 임대)과 투자인가서 상에 명기했던 OS개발 및 수출 등 두 갈래로나누어져 있었다.

「파콤」영업의 경우 출범 당시 국내 공급실적이 11대였던 것이 2년 만인76년에 26대에 이르는 등 큰 폭의 신장세를 보였다. 이같은 신장세는 특히당시 김대중 납치사건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등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각종 후일담이 적지않게 전해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화콤코리아에 주재했던 한 일본인 직원은 『외출시 일본어를사용하지 말 것, 넥타이 차림의 정장을 하지 말 것』 등을 지시받은 기억이난다고 「한국후지쯔20년사』에서 회고하고 있을 정도다.

화콤코리아의 당시 주력 기종은 「파콤 230」모델로서 IBM의 대형시스템「시스템/360」에 대응하는 x5시리즈와 「시스템/370」에 대응하는 x8시리즈였다. x5시리즈란 이를테면 「파콤230-25」, 「파콤230-35」, x8시리즈는 「파콤230-58」, 「파콤230-48」 하는 식의 명칭이었다.

화콤코리아는 첫 고객으로 포항제철이라는 대어를 낚은데 이어 75년에는 IBM의 「시스템/360」을 사용하던 한국전력을 「파콤230-45S」로 리플레이스(Replace:기종대체 또는 타기종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혁혁한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OS개발과 수출사업부문 역시 출범 이듬해인 75년부터 곧바로 흑자로 돌아설 만큼 호조를 보였다. 주요 개발분야는 핵심부분인 작업관리(Job Mamagement)를 비롯, 컴파일러, 어셈블러번역기, 분류/병합(Sort/Merge)프로그램과프로그램 동작상태를 추적하는 대화형 디버거(Interactive Debuger), 각종시스템유틸리티 등 OS를 구성하는 것들로서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OS는 모두 일본 후지쯔에 수출됐는데 출범 첫해 14만 달러이던 것이 75년에는 39만 달러, 76년에는 55만 달러, 77년 76만 달러 등으로급상승했다. 당시 키펀치용역 중심에 국내 소프트웨어 총수출액은 75년에 75만 달러, 76년 77만에 불과했다. 화콤코리아 1개사의 수출액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4.2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8) 도약기 (4) 삼성전자와 휴렛패커드 [/size:3jox9q8u]

대기업들이 국내 컴퓨터 산업분야 진출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시기는 76년부터이다. 당시는 국내에 컴퓨터가 도입된 지 10년째로 접어드는시기였다. 이때 국내 컴퓨터산업을 이끌었던 3대 축은 한국IBM 등 외국계 현지법인, 동양전산기술(OCE) 등 외국컴퓨터기종 국내 대리점, 한국전자계산(KCC) 등 소프트웨어 용역개발회사였다.

이 당시 삼성전자, 금성사, 대한전선과 같은 전자산업 분야 대기업들의 사업영역은 흑백TV,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정부가 수출을 주도하고 장려하는가전 분야에 집중돼 있었다. 대기업들이 조기에 컴퓨터 분야에 눈을 돌리지않았던 것은 관련 기술이나 노하우 축적이 전무했던 데다 사업전망에 대해서도 대부분 비관적 시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결정이나 투자에 대한 우선 순위에서도 컴퓨터는 항상 가전 등 다른 분야에 밀렸다.

그러나 75년을 전후하여 국내 컴퓨터 도입이 급증세를 보이고 동양전산기술과 같은 중소기업이 미니컴퓨터 단말기 등을 국산화하면서 대기업들의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은 무엇보다도 전자산업이 고도화돼 가면서 전자 제품의 용도가 가정에서 산업 현장으로 확대돼가고 있음을 보았던것이다. 산업용 전자가 바로 컴퓨터인데 이때 부터 대기업들은 부랴부랴 시장진출을 검토하고 제품 공급선의 확보하거나 직접 생산방법 등을 찾아 나서게 된다.

76년을 전후해서 이같은 움직임을 보였던 곳으로는 삼성전자, 금성사, 금성전기, 금호실업, 대우, 금성통신, 동양정밀(OPC), 벽산, 쌍용양회, 두산등이었다. 이들의 컴퓨터 분야 진출에 대한 검토는 2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하나는 미국과 일본 컴퓨터기업과 제휴, 국내에서 합작 생산을 추진하는 것이고 또 하는 외국기업의 대리점 사업을 통해 우선 노하우부터 축적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금성전기와 선경이 일본전기(NEC)의 미니컴퓨터기종 조립생산검토에 나섰고 대한전선은 후지쯔의 「파콤」시리즈 생산을 추진했다.금성통신과 동양정밀은 합작회사인 한국시스템산업을 설립하고 외국의 기술제휴선을 찾아 나설 정도였다.

또 후자 입장에서 외국업체의 국내 총대리점 사업에 나선 곳은 삼성전자(휴렛패커드), 금호실업(왕래버러토리즈), 오리콤(디지탈이큅먼트), OPC(데이터제너럴), 한국화약(포 페이스), 효성(히다치) 등을 꼽을 수 있다. 금성사는 79년 맨 마지막으로 하니웰사 제품을 국내 공급하면서 컴퓨터사업 참여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 기업 가운데 오늘날까지 컴퓨터 사업을 꾸준하게 이끌어 온 곳은 금성사와 삼성전자 뿐이다.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도산했거나 사업담당부서가다른 기업으로 인수된 경우에 해당된다. 국내에서 가장 잘 나가던 컴퓨터기종 가운데 하나인 디지탈이큅먼트(DEC)를 공급하던 오리콤의 경우 나중에 두산컴퓨터를 설립하는 등 승승장구하지만 80년대 DEC이 현지법인을 설립하자회사조직이 공중분해 돼버렸다. 금호실업은 컴퓨터코리아라는 기업에 사업자체를 넘겼고 동양정밀은 동양시스템산업이라는 계열사를 통해 투자의욕을 보여지만 80년대말 그룹 전체가 부도를 내면서 운명을 달리했다. 금성전기와금성통신은 금성사로 조직이 이관됐다.

물론 엄밀하게 따진다면 삼성전자와 금성사의 컴퓨터사업 부문에 대한 계보도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삼성전자의 휴렛팩커드(HP)사업부문은 84년 삼성휴렛팩커드로 독립돼 나갔고 금성사의 하니웰사업 부분역시 81년 하니웰본사와의 공동 기술제휴 계약에 의해 계열사인 금성반도체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국내 컴퓨터 산업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성장한 양사의 컴퓨터사업 부문은 적어도 계보상으로는 HP나하니웰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사의 오늘날 위치가 HP와 하니웰의 국내공급 또는 합작생산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에 기반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삼성전자와 금성사 등 두 별 가운데 컴퓨터사업을 먼저 시작한 삼성전자쪽이다.

70년대 초반 가전 분야에 이은 컴퓨터 분야에서의 별들의 전쟁은 76년 10월 HP와 대리점계약을 체결한 삼성전자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삼성전자의 선공에 대한 금성사의 응수는 78년 8월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고 미국의 하니웰사의 대리점 사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양사 모두 세계적으로 선풍을 몰고온 벤처기업 출신의 미국 컴퓨터회사 제품을 국내 들여와 공급하는총판영업으로 국내 컴퓨터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제1라운드 별들의 전쟁은 에상 외로 싱겁게 끝났다. 사실금성사보다 2년 먼저 사업을 시작한 삼성전자의 승리는 이미 예고된 거나 다름 없었다. 금성사 입장에서도 80년대를 기대하는 선에서 1라운드 게임을 매듭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6년부터 79년말까지 삼성전자가 국내에 공급 HP 주력 「HP 3000」 미니컴퓨터 기종은 무려 50대가 넘는다. 이같은 실적은 미니컴퓨터 분야에서 HP보다 4∼5년 먼저 국내 진출한 DEC, 데이터제너럴, 왕 등 3총사 가운데 왕은이미 앞질렀던 것이고 데이터제너널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치였던 것이었다. 반면 금성사는 이 기간 동안 공급한 하니웰 기종은 계열 럭키화학에설치한 「하니웰 레블6」 단 1대 뿐이었다.

삼성전자가 컴퓨터사업에 진출하게 된 배경에는 전자산업 전반에서 치열한주도권 경쟁을 벌인 금성사를 의식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당시 삼성 측 직원이던 Q씨는 들려주고 있다.

『75년 이후 삼성은 흑백TV, 컬러TV, 냉장고, 전자레인지, 세탁기, 디지탈오디오 등 가전분야에서 금성과 막상막하의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죠. 모든분야의 출발이 금성에 뒤졌지만 75년 이후 삼성의 만회가 눈에 보일 정도였죠. 이때 삼성 경영진들은 기존 분야에서 금성을 추월하는 것은 그다지 큰어려움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 이를테면 금성이 진출하지 않은 분야이면서 장래가 유망한 분야…그것이 바로 컴퓨터 분야였던 거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75년 말이었고 삼성전자는 이때부터 미국과 일본지역의 그룹 거점망을 통해 대상 기업 물색에 나선다. 접촉 대상은 우선 국내에 현지법인이나 총대리점이 없으면서 시장성이 높은 제품을 내놓고 있는 기업이었다. 이때 삼성이 눈여겨 보았던 곳이 바로 미국 HP사였다. 74년 설립된 HP는 컴퓨터와 계측기 분야에서 미국시장을 휩쓸고 70년대 들어 일본 시장까지 넘보고 있었다. 삼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내 합작법인 요코가와휴렛팩커드(YHP)의 중개로 76년 8월 HP와 컴퓨터와 계측기 분야의 국내 독점공급 게약을 맺었다. 이어서 같은해 11월에는 전자사업본부 내에 HP영업과지원을 담당할 컴퓨터시스템부를 조직하게 된다.

삼성전자 컴퓨터시스템부가 급성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HP와 계약을체결한 지 1년 만인 77년 8월에 찾아 들었다. 서울대 등 8개 국립대학과 연세대를 포함, 모두 9개 대학의 컴퓨터 도입기종 일괄 입찰에서 삼성이 최종낙찰된 것이다. 이 입찰은 문교부가 고급 전산기술 인력 양성과 대학교육의질적수준 향상을 꾀한다는 취지 아래 국제개발은행(IBRD)자금을 동원, 75년부터 추진해 오던 것이어서 사회적 관심도 높았다.

조달청이 실시한 이 입찰은 대학마다 1대 씩 모두 9대의 미니컴퓨터 기종일괄 공급할 업체를 결정하는 것이었는데 참여회사는 삼성전자(HP), 동양물산(일본 오키전기), 동양전산기술(DEC), 한국전자계산(미국 프라임) 등 10개사나 됐다. 그뿐만 아니라 니혼미니컴퓨터(현 일본 데이터제너럴) 등 일본기업은 한국대리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입찰에 응하기도 했다. Q씨가 우연한기회에 입수, 현재까지 소지하고 있는 각사 응찰내역 문서들을 보면 「HP3000 II」를 제안한 삼성전자의 입찰금액은 모두 1백36만 달러로 기록돼 있다.

Q씨는 당시 「HP 3000 II」 9대분의 국제 입찰가격은 2백50만 달러였는데절반에 가까운 가격으로 응찰한 것은 HP본사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려주고 있다.

이전까지 HP기종 공급 실적이 1대에 불과하던 삼성전자는 한꺼번에 9대의공급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지원 및 영업 조직을 갖추게 된다. 삼성전자는 또 9대의 컴퓨터 설치가 완료된 78년 4월을 기해 컴퓨터시스템부와계측기부를 주축으로 하는 산업기기사업본부를 출범시키면서 독립채산제 성격의 컴퓨터 사업조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삼성전자가 덤핑 입찰을 불사하면서 9개 대학 기종공급권을 따낸 것은 도입기관이 교육기관이자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파급효과를 노린 것인데이 의중은 그대로 적중한다. 실제 78년 한해 동안 삼성전자의 HP기종 판패실적은 국내 미니컴퓨터시장의 50%를 독식했고 HP의 해외판매업체중 일본 YHP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89년 발간된 사사 「삼성전자 20년사」는 이때의 전후 사정에 대해 『77년전국 9개 대학 컴퓨터 공동구매 입찰에서 낙찰에 성공함으로써 사업기반을굳혀 나갔다. 이 성과에 힘입어 일반 기업체를 대상으로 판매를 촉진 시켰고…』라고 적고 있다.

삼성전자의 컴퓨터사업 부분의 초창기 주역들로는 초대 컴퓨터시스템부장전인수를 비롯, 영업과장 김영한(현하이테크리서치 소장), 지원과장 임득순(현 한국HP이사) 등이다.

한편 78년 8월 금성사는 당시 부사장이던 심흥주(현 큐닉스 회장)를 사업부장으로, 김대규(현 한국데이터베이스학회 회장)를 컴퓨터본부장으로 컴퓨터사업부를 발족시켜 삼성전자의 쾌속질주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어 78년10월 하니웰과 독점총판계약을 맺고 「하니웰 레블6」 기종의 국내 공급을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금성사가 70년대 말까지 주력한 부분은 76년 출범한 금성중앙연구소가 국산화한 금전등록기나 전자식 출납회계기 사무기기였다. 금성사는 삼성전자와 달리 이들 전자 사무기기를 마이크로컴퓨터 칩을 이용하는 최첨단컴퓨터 응용기기로 여겼고 금성중앙연구소를 통해 이들 기기를 시장 주력 품목으로 육성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5.0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19) 도약기 (5) 컴퓨터 국산화의 세가지 갈래[/size:3jox9q8u]

70년대 중반이후 컴퓨터 국산화는 대략 세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동양기술전산(OCE) 등이 미국 디지털 이퀴프먼트(DEC)의 CPU보드 등핵심부품을 들여와 미니컴퓨터를 조립생산하는 방법이었다. 이를테면 DEC에서 공급받은 핵심부품에 국내에서 생산된 부품을 결합, 국산화율을 높여나가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당시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인텔사의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들여와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 또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내장 주변기기를개발, 생산하는 일이었다. 마이크로컴퓨터 생산은 70년대 후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80년대 초 삼보컴퓨터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기반한 PC산업을 일구는 기초가 된다.

세번째는 가장 활발했던 분야로 중대형 컴퓨터용 CRT단말기를 한글화하는작업이었다. 한글정보가 단말기 화면에 표시될 때 자모 모아쓰기 형태로 단번에 나타나는 기술이 개발된 것도 이때부터다. 한글 CRT단말기 개발은 우리나라 컴퓨터 이용률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키는 요인이 됐고 컴퓨터 한글처리기술의 토양이 되기도 했다.

동양전산기술이 시도한 미니컴퓨터 국산화는 상당히 모험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때는 획기적인 작업이었다. 동양전산기술은 DEC측과 두종류의 거래를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었던 미니컴퓨터 「PDP 8」, 「PDP 11」 등 「PDP」시리즈를 국내에 공급하는 총대리점 역할이었고또 하나는 PDP 11을 국내에서 직접 조립생산, 자기상표로 공급키로 한 일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컴퓨터 기술자들이 몰려있던 동양전산기술의 DEC 총대리점 사업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70년 중반에서 7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종이 PDP시리즈였다는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해준다. 참고로 75년 2월 설립된 동양전산기술은 79년까지 4년 동안 모두 58대의 컴퓨터를 국내 공급했는데 이 수치는 67년 진출한 한국IBM이 79년까지 12년 동안 공급한75대에 이어 종합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동양전산기술이 PDP 11을 조립생산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같은 판매실적에서 얻은 자신감에서 비록됐다. 동양전산기술은 초기에는 주요부품을 모두 DEC등 미국회사에서 조달해 PDP 11을 조립생산할 작정이었다.

예컨대 DEC의 PDP 11용 CPU보드 장치, 메모렉스사의 디스크장치, 컨트롤데이터의 CRT단말기, 데이터프로덕츠의 프린터, 도큐먼테이션사의 카드판독기등을 각각 별도로 구입, 이를 완제품으로 조립해내는 일종의 OEM방식이었던셈이다. 자기상표는 회사의 영문명칭 「Oriental Computer Engineering」에서 딴 「오리콤(ORICOM)」으로 정해졌다.

이렇게 해서 76년 처음 조립생산해낸 것이 바로 「오리콤540」이다. 오리콤540 시리즈는 기억용량에 따라 32에서 1백92까지 모델이 다향했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오리콤540의 초기고객으로 동양나이론과 인하대학교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오리콤540 개발 당시 동양전산기술에 재직했던 인물들을 보면 이윤기(전엘렉스컴퓨터 사장), 권순덕(현 한맥소프트웨어 사장), 김천사(현 두산정보통신 사장), 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 김주현(현 삼성전자 전무), 김영한(현 하이테크리서치 소장), 김영식(현 엘렉스컴퓨터 사장), 최규대, 이정희(현 삼보컴퓨터 사장), 김의현 등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오늘날 이들이 하나같이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위치에 올라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이 동양전산기술에서 추진했던 컴퓨터 국산화의 목표는 상당히 원대하고 체계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단계별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예컨대 하드웨어의 경우 기기단위OEM→부품단위OEM→부품생산을 거쳐 완전 국산화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또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응용프로그램 개발→응용프로그램 패키지화→운용체계 개발에 이른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동양전산기술의 미니컴퓨터 중장기 국산화 추진계획은 그러나 첫작품인 오리콤 540 시리즈가 동급 외국산 기종에 비해 가격 경쟁력에서 현격한 열세를면치 못하면서 1년도 되지 않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거액을 투자한 오리콤540의 판매난이 가중되면서 사세가 기울었고 마침내는 회사경영권이 80년을 전후해 서서히 두산그룹으로 넘어가 이 계획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양전산기술의 신화는 다른 기업에 그대로 이어져 70년대 후반 삼성전자와 금성사가 각각 미국의 휴렛패커드와 하니웰 기종을, 효성그룹의 동양나이론은 일본의 히타치 기종을 각각 국내 조립생산키로 하는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금성전기가 미니컴퓨터보다 한단계 아래인 마이크로컴퓨터나 프린터 등 주변장치의 국산화를 시도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동양전산기술의 오리콤 540영향을 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금성전기는 76년 11월부터 77년 7월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수체제어연구실과 공동으로 국내최초 마이크로컴퓨터 「GSCOM80A」와 역시 최초의국산 잉크제트프린터 「GS JET1200」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금성전기와 KIST가 이때 GSCOM80A의 CPU로 장착했던 것이 바로 미국의 인텔사가 75년 발표한 8비트용 8080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GS JET1200 프린터제어에는 모토롤러의 6800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이 채용되기도 했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컴퓨터 CPU나 주변기기 제어에 처음으로 채택되는 순간이었다.

GSCOM80A는 특히 국내처음으로 디스크 오퍼레이팅 시스템 즉 도스(DOS)운용체계를 채용한 컴퓨터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이때 사용된 도스는 「MSDOS」의 할아버지격인 미국 디지털리서치사(92년 노벨사에 합병됨)의 「CP/M80」이었다. GSCOM80A는 또 응용프로그램 개발언어로 포트란이나 코볼이 아닌 베이식이 처음으로 사용됐다.

77년 7월 6일 서울역 럭키빌딩 종합전시장에서는 GSCOM80A 마이크로컴퓨터와 GS JET1200 잉크제트프린터, 「GSM 2000」도트매트릭스 프린터 등 3종의국산컴퓨터 발표회가 열렸는데 보기 드문 성황을 이뤘다.

당시 두개의 중앙일간지는 금성전기가 이날 발표한 3종의 컴퓨터 신제품에대해 『일반 사무용, 교육 및 과학기술용, 전자통신 및 산업기계제어용, 중대형 컴퓨터의 지능형 단말기용 등 그 용도가 무한해 국산컴퓨터 개발역사에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됐다』고 적고 있다. (GSM80A, GS JET1200, GSM 2000 등은 80년대에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다음 호에서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한편 당시 업계에서 가장 활발했던 모아쓰기 한글CRT단말기의 개발은 78년부터 삼성전자와 금성사 등이 주도했다.

CRT단말기란 음극선관(Cathode Ray Tube)을 이용해 컴퓨터 처리결과를 화면에 출력하는 장치로 최근까지도 중대형 컴퓨터용 단말기로 가장 많이 사용됐다. 이 단말기는 자체에 처리장치를 갖지 않는 대신 키보드를 통해 주컴퓨터에 명령어를 보내고 그 처리결과를 화면으로 출력해주는 역할을 했다. 중대형 컴퓨터는 보통 수십대에서 수백대의 CRT단말기를 접속해 사용자들이 주컴퓨터의 자원을 시분할(Time Sharing)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었다.

CRT단말기의 한글화는 주컴퓨터에서 불러오는 정보를 CRT화면에 한글로 표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한글CRT단말기는 IBM, 컨트롤데이터 등에서개발돼 상품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단말기에 출력되는 한글정보는 한글자모 한 자에 영문 알파벳 한 자를 대응해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많」이나 「옳」처럼 복자음 받침이 오는 한글 한 자를 표현할경우에는 영문 알파벳 넉 자를 한꺼번에 묶어 복잡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글자들은 화면상에 자모 단위로 출력돼 영문출력에 비해 처리속도가 크게 떨어졌고 인자품위도 형편이 없었다.

이같은 한계를 극복, 78년 3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글 모아쓰기 CRT단말기를 개발한 곳은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는 당시 판매에 호조를 보이고 있는 휴렛패커드의 미니컴퓨터 기종 「HP 3000」에 접속해 사용할 수 있는 한글 모아쓰기 CRT단말기 「ST 101」을 동방생명빌딩(현 삼성생명빌딩)에서 발표, 화제를 모았다.

뒤이어 코트로닉스사가 78년 7월 당시 미국 미주리대학 교수이던 김현영의도움으로 두번째 모아쓰기 한글CRT단말기를 개발했다. 코트로닉스 제품의 특징은 모아쓰기용 한글문자 생성기 프로그램을 롬(ROM)에 내장함으로써 시스템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또 롬 속에는 초성 3벌과 중성 2벌 및 1벌의 종성이 들어있어 인자의 품위를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아냈다.

78년 10월에는 국내에서 세번째로 금성사가 컴퓨터사업부 출범과 함께 모아쓰기 한글CRT단말기 「GDT9720」 개발에 성공했다. GDT9720은 최초로 자음과 모음만의 2벌식으로 키보드자판을 지원한 한글CRT단말기로 기록되고 있다.

모아쓰기용 한글 CRT단말기의 개발은 따지고 보면 한글처리를 소프트웨어적으로 구현한 결과였다. 한글 모아쓰기 처리 프로그램을 개발해 주컴퓨터의기억장치에 설치하거나 롬 반도체에 구워 본체에 내장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한글처리 기술은 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청계천한글카드 등 일반 컴퓨터의 한글처리용 확장카드 개발기술로 이어졌고 워드프로세서 등 한글소프트웨어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주민등록 조회나 영수증 발행 등 공공기관의 행정전산화 도입시기를 앞당기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5.09

[size=150:3jox9q8u]컴퓨터 파노라마 (20) 도약기 (6)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과 마이크로컴퓨터[/size:3jox9q8u]

미국의 벤처기업 인텔이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를 개발한것은 1971년이었다. 「4004」는 외부와 데이터를 주고 받는 버스 단위가 4비트로서 현재의 64비트 펜티엄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단순 비교해 보면 그 단위가 16배나 적은 것이다.

「4004」는 70년대 후반의 마이크로컴퓨터, 즉 PC혁명의 발단이 됐던 「8088」마이크로프로세서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제품이다. 「4004」가 「8088」로 가기 전에 거쳤던 단계가 바로 아들뻘인 「8080」이다.

미국에서 「8080」 또는 그 계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로 채택한 마이크로컴퓨터가 출현한 것은 75년 MITS라는 소기업에 의해서였다. 국내에서는 77년 7월 금성전기(현재는 LG전자, LG산전 등으로 분산합병됨)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공동 개발한 「GSCOM-80A」가 그 효시이다.

「GSCOM-80A」는 순수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개발된 최초의 국산 마이크로컴퓨터였고 장차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성시대를 예고했다는 점에서 국내외 관심이 집중된 제품이었다.

「GSCOM-80A」는 그러나 성대한 발표행사까지 치뤘지만 경험부족으로 실전배치나 상업화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때문에 「GSCOM-80A」보다는 81년에 발표돼 상업화에 성공한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삼보컴퓨터)의 「SE 8001」이 최초의 국산 마이크로컴퓨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다시 인텔의 「4004」에 관한 얘기로 되돌아 가자. 「4004」에 집적된 트랜지스터수는 2천2백5개로 알려지고 있다.(참고로 펜티엄은 4백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돼 있다) 인텔은 「4004」를 이용해서 「마이크로컴퓨터시스템4」라는 마이크로컴퓨터를 개발했다. 이 컴퓨터는 그러나 오늘날 숫자계산전용의 전자계산기(Calculator)정도의 성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이크로컴퓨터시스템4」의 CPU로 채택된 「4004」의 계산능력은 46년에개발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액」보다 나았다. 1만8천개의 진공관으로구성된 「에니액」은 무게만 30톤이었고 전체 외형은 왠만한 덤프트럭만했다. 반면 가로세로 4x3mm였던 「4004」는 실제 크기가 「에니액」의 영문자인 ENIAC에서 첫자와 두번째자인 E자와 N자를 합친 것에 불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4004」는 단순히 크기가 작고 성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주목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전문가나 다른 반도체회사 관계자들만의 관심사였겠지만 「4004」개발이 갖는 진짜 의미는 다른 데에 있었다.

「4004」는 프로그램을 기록된 칩과 데이터 입출력 통로가 되는 칩 등 2개의 메모리칩으로 구성돼 있었다. 프로그램 칩 부문은 CPU로서 마이크로프로세서 자체를 구동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입출력 통로는 처리를 위해 외부로부터 불러온 데이터를 호출해놓는 곳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이를테면 컴퓨터의 중앙 처리과정과 단계를 그대로 축소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인텔은 「4004」후속으로 74년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4천5백에 이르고 데이터를 주고 받는 단위가 8비트인 「8080」을 발표하게 된다. 「8080」은 「4004」보다 20배나 빠른 연산속도를 자랑했다. 인텔이 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가운데 75년에는 모토롤러가 「8080」에 대응하는 8비트 「M6800」을 발표했고 텍서스 인스트루먼트(TI)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I) 등이 잇따라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에 뛰어들었다.

벤처기업 MITS이 사상 최초로 「8080」을 탑재한 마이크로컴퓨터 「알테어」를 발표한 것은 모토롤러가 「M6800」을 발표할 즈음인 75년 이었다. 「알테어」는 75년 한해 동안에만 2천대가 제작돼 모두 팔려나갔고 MITS사는 졸지에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그런데 MITS의 창업자가 누구였을까. 바로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게이츠와 그의 친구 에드 로버츠였다. 「알테어」의 성공을 처음부터 지켜본본 빌 게이츠는 최근에 출간한 한 전기에서 『마이크로컴퓨터의 장래가 매우밝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빌게이츠의 왕국」).
그해 4월 선배인 폴 알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한 것도 이같은 직감에 의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첫 소프트웨어 작품은 「알테어」에서 실행할 수 있는 베이식 언어였다.

75년 말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에 「바이트숍」이라고 이름 붙여진 최초의 마이크컴퓨터 소매점이 등장했다. 컴퓨터를 텔레비전 수상기처럼거리의 쇼윈도에 전시해 놓고 판매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마이크로컴퓨터의 양대상맥인 애플이 탄생한 것은 76년이다. 널리 알려진얘기이지만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우즈니액이 함께 설립한 애플사는 같은해4월 「M6800」을 CPU로 탑재한 「애플Ⅰ」을 발표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년만인 77년 4월에 발표한 「애플Ⅱ」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세계는 바야흐로마이크로컴퓨터((당시까지는 PC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열풍에 휩싸이게된다.

일이 이쯤 되자 시장조사회사들은 75년 당시 5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반도체시장 규모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가세로 76년에 1억5천만 달러로 3배 팽창했다고 발표했고 80년에는 4억5천만 달러에 이를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알테어」에서 「애플Ⅱ」에 이르는 마이크로컴퓨터 열풍은 76년부터 국내에도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알테어」를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는 76년 11월 금성전기 전산실과KIST수치제어연구실 공동으로 시작됐다. 금성전기 측은 주로 자금을 대고 KIST 측은 실질적인 연구개발 인력을 투입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물들은 KIST 측에서 구지회(전 가인시스템사장), 이만재(현 숙대 교수)등 당시명성을 날리던 20∼30대 젊은 두되들이 주를 이루었고 금성전기 측에서는 유황빈(현 광운대교수)등이 가세했다.

이들이 개발한 것은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 「GSCOM-80A」와 이 컴퓨터에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잉크제트프린터 「GSJET-1200」와 도트매트릭스 방식의 한글지원프린터 「GSM 2000」등 주변장치였다.

「GSCOM-80A」은 「8080」계열로 인텔이 76년 발표한 「8080A」를 CPU로탑재하고 있었다. 「8080A」는 64KB의 메모리를 지원할 수 있었고 「8080」보다 약간 작은 4천개의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갖고 있었다. 클럭속도는 2MHz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기억용량은 8KB였고 사이클 주기가 5백ns(나노秒)나 되는 램(RAM)이 기억장치로 사용됐다. 8KB의 주기억용량은 당시 디지탈이큅먼트(DEC)나 휴렛팩커드의 미니컴퓨터 기종들이 주로 16~32KB를 채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많은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GSCOM-80A」에 채택된 데이터 버스는 미국에서 「8080」용으로 설계돼인기가 높았던 「S-100버스」였다. 「S-100버스」는 1백개의 유니버셜 형 버스와 22개의 슬롯(장치 연결구)을 갖고 있었다. 「GSCOM-80A」가 순수 국내기술진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은 바로 이 「S-100버스」에 마이크프로세서, 기억장치 등 핵심부품과 각종 입출력장치 등을 논리적으로 배열시킨 것을 의미한다. 즉 핵심부품의 배열을 독자적으로 설계해낸 것이다. <그림 참조>
「GSCOM-80A」의 디스크운용체제(DOS:Disk Operating System)로는 76년 미국 디지탈리서치사가 발표한 「8080」시리즈용 「CP/M-80」이 채택됐다. 프로그램 개발언어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알테어」용 베이식으로 결정됐다.

「CP/M-80」의 주요 명령어로는 editor, assembler, assign, list, sysgen, ddt, pip, basic 등으로 81년 발표된 「MS-DOS」의 명령어에 그대로 채용됐거나 큰 영향을 줬던 것들이다.

베이식은 당시까지 주력 프로그램 언어였던 포트란이나 코볼 등을 능가하는 고급언어로서 과학기술 및 일반사무용 응용프로그램 작성에 탁월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혔다.

77년 7월 럭키빌딩 종합전시장에서 발표된 「GSCOM-80A」는 용도 및 주변장치의 구성에 따라 일반 사무용, 교육 및 과학기술용, 중대형 컴퓨터 단말기용, 계측제어용 등 4종류의 모델로 나눠졌다.

일반 사무용은 다양한 주변장치를 접속할 수 있어 관공서, 일반기업체 등에 설치할 수 있도록 한 모델로서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와 카세트테입레코더를 보조기억 장치로 사용할 수 있었다.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주된 사용자층으로 한 과학기술용 모델은 베이식언어를 얹어 과학기술 계산을 쉽게 처리할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었다. 모뎀을내장한 단말기용 모델은 스탠드얼론 기능을 가지면서 중대형 컴퓨터에 접속되면 배치터미널로도 사용이 가능한 인텔리전트형 컴퓨터였다.

계측제어용 모델은 관련 인터페이스장치를 부착, 공작기계, 전자통신, 의료기기, 측정기의 컨트롤러로 사용할 수 있었다.

「GSCOM-80A」와 함께 개발된 잉크제트 방식의 「GSJET-1200」프린터 역시「8080」시리즈는 아니었지만 제어장치로서 별도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하고 있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내장은 이 프린터가 어떤 컴퓨터에도 온라인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마이크로컴퓨터나 주변장치의 잇따른 출현은바야흐로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마이크로프로세서나 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한 대형컴퓨터공급회사들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0년대 후반당시 IBM, 스페리, 컨트롤데이터 등 기업관계자들이나 교수들의 기고문을 보면 마이크로프로세서나 마이크로컴퓨터를 대형 컴퓨터의 경쟁자로서보다는새로운 단위 부품 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역사의 아이로니였을까, 과학기술의 진보였을까.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오늘날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대형 컴퓨터의 위상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5.16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